대서양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최근 <대서양 문명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시사점이 많은 것 같아서, 약간의 편집을 거쳐서 공유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2장. 15세기 에스파냐의 번영과 몰락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경유 한 항해도를 갖고 있었고, 이미 막강한 Cashcow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수입이 있다는 사실은 한편 새로운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계획을 포르투갈 왕에게 고하고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대서양을 횡단하겠다는 생각을 황당하거나 지나치게 위험비용이 높은 사업으로 평가했다. 사실, 이미 발전하고 있었던 인도 항로 개척사업의 눈부신 성장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항로를 열 수 있었던 기회를 외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포르투갈 왕실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향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대서양에서의 위치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의 성공은 뒤이은 가능성에 눈을 감게 만든다.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고 문명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식적 지평의 확대는 대부분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가 자신의 세상 속에 갇혀 있을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타자는 쉽게 인식하게 한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은 그런 측면에서 엄청난 사건이다. 서로 다른 문명권의 조우를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양자 모두에게 새로운 인식적 지평을 열어준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의미했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을 인식함으로써 중세적 의식의 지리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는 역설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종교의 힘이 아니면 이렇게 집요하게 발견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발견을 인해서 서서히 그들의 종교적 기반이 약화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으로 떠났을까? 십자군 전쟁도 그랬지만, 역사에서의 원인과 결과는 참으로 역설적인 경우가 많다.
첫 번째 힘은 종교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프레스터 존이라는 나라를 찾겠다는 그들의 열망은 아주 강했다. 두 번째는 이슬람이다. 강력한 이슬람 세력 덕분에, 역설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태평양 세계는 반대로 그러한 절박함이 부족했다. 3번째론 민족국가의 탄생과 왕의 권력이다. 왕의 중앙집권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선 팽창을 지속해야만 했고 신대륙은 좋은 기회였다. 4번째 요인은 황금이다. 콜럼버스를 따라 나선 선원들은 황금을 찾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합류했고, 기독교의 전파와 황금의 취득은 결코 양립 불가능한 목적이 아니었다. 5번째는 유대인 추방령인데,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콜롬버스의 선단에 올랐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식과 기술은 대규모 함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마지막 요인은 콜롬버스 자신의 자기만족적 도전정신이다. 그의 항해일지에는 이런 말이 반복적으로 쓰여있다. 그 자신이 마치 오디세우스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보다 많은 땅을 발견하고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전하에게 그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들은 경이로운 관개시설을 구축하고, 놀라운 직조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뇌수술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최대의 취약점은 비효율적인 문자 체계에 있었다. 그들의 문자와 서사는 다양하게 발달하지 못했고, 이는 국가의 결집을 방해했다. 이는 마치 <사피엔스>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우리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서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은 모두 점을 쳐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 경계선에서>라는 책을 보면, 지식을 믿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한 문명이 쇠락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잉카는 균형을 잃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관련된 글) 물론 문명 붕괴의 실질적으로 영향을 준 건 이미 <총 균 쇠>에서 다뤄진 것처럼 유럽으로부터 전해진 천연두였다. 에스파냐 인들의 고의성이 가장 낮은 요인이지만, 가장 많은 사망자를 초래한 요인이었다.
포르투갈과 비슷하게도, 그들은 식민지 경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자체 산업을 육성하는데 소홀했다. 약탈 무역에만 치중하는 과정에서 자체 상품의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한 역사가는 천년 간 생산된 금을 3년 만에 모두 약탈했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유럽 화폐의 대부분은 식민지의 금과 은으로 주조되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의 이익을 재투자하여 국가 하부구조를 튼튼히 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내실이 없었다. 또한 자국 내 생산기반의 부족과 그들의 이념적 편향성은 신교도와 유대인의 이주로 이어지고, 그들은 암스테르담이나 런던으로 떠난다. 이후에 패러다임을 장악한 국가가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라는 사실을 보자면, 그야말로 죽쒀서 개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