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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Feb 05. 2016

마야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_지금 경계선에서

레베카 코스타 <지금 경계선에서>, 쌤엔파커스


지금부터 쓰는 이 글은 내가 꼭 쓰고 싶었던 주제다. 첫 구상을 2013년에 했으니,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3년 정도 하게 되면, 최초에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지 까먹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반성한다. 그저 쓰면 되는 것을 미뤘던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보태고 싶다.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이 글의 모티브는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란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책은 하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야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사실 이 제국은 그리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마야제국의 인구가 1,500만 명을 상회했으며 인구 밀도는 오늘날의 시카고와 같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내부 시스템도 잘 갖춰진 하나의 국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기 750년부터 850년 사이에 돌연 자취를 감춘다. 


도대체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 문명 붕괴의 진정한 원인


레베카 코스타의 결론은 이것이다. 마야인들이 직면했던 문제의 복잡함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는 것. 그렇게 가속화된 만성적 문제가 오랜 시간 번영한 마야 문명을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이다. "어떤 사회가 더 이상 문제의 해결책을 ‘사고’할 수 없게 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인식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사회가 일단 이 인식 한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종국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해당 문명을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바로 붕괴의 진정한 원인이다.” (p.35) 저자에 따르면 사회가 이렇게 위기에 처하기 위해선 몇 번의 징후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정체 상태다. 더 크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지만, 기존에 해결하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미친 짓’이 연상된다. 이것은 미친 짓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은 어떤가?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동 아닌가? 기존에 해보지 않은 행동 그 자체가 너무 두렵고 무서운 까닭에, 우린 ‘익숙한 것’만 반복하면서 자신을 위안한다. 마치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새로운 시도를 겁내면서, 자신에게 익숙한 토익과 스팩에 매달리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해 왔던 행동이 공부이기에,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징후가 이어진다. "상황이 더욱 절망적으로 악화되면 두 번째 징후가 나타난다. 즉,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다. … 몸은 점점 지치고 그에 따라 두려움이 고개를 들지만 어떤 데이터, 정보, 사실로도 우리의 믿음을 꺽지는 못한다.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p.40) 믿음이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 이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며,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을 습득할 수 없을 때 사실 대신 믿음을 택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고, 이 책 <지금 경계선에서>에서는 '입증되지 않은 관념'을 뜻한다. 그리고 지식은 믿음과 반대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로, 지식은 어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은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믿음이 이러한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사람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 믿음을 흔들려는 모든 이는 바로 적이 된다. 맹목적 믿음은 언제나 그런 외부와의 갈등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어떤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십자군과 나치 그리고 IS에서 그 공통점을 확인한다.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사실, 어느 정도의 믿음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하루의 시작에서 끝까지,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아마 인간은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린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 ‘믿기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있고,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면 차가 멈출 거라고 ‘믿기 때문에’ 무사히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도 있다. 그건 바로, "믿음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그렇다고 여기면 되기에 믿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믿음보다 획득하기 훨씬 어렵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식을 얻는 데는 추상, 탐구, 학습, 추론, 분석, 종합, 의사결정, 판단과 같은 복잡한 인식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모방, 응용, 해석, 검토 등도 필요하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하면 지식 습득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p.42) 단순한 결론이지만, 당시 책을 읽던 나에겐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을 탐구하는 쪽보단 믿음을 따르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구나. 물길로 치면, 저항(바위나 나무)이 적은 쪽으로 더 많은 물이 흐르는 법이고, 개념으로 말하자면 ‘확증편향’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 쉬운 말로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자명한 사실. 인간은 왜 그렇게 할까?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할까?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수 있을까? 


마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비에 의존해서 물을 공급받는 상태였고, 그것이 꽤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수량이 지속해서 감소세를 보였음에도 마야 시민들은 그 상황을 직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를 회피한 결과, 그들은 거대한 ‘재물과 의식'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파국을 맞이한다. 마크 스티븐슨 기자는 “고고학자들, 인간제물의 증거를 발굴하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제물이 된 사람들은 심장이 도려내어지거나, 목이 잘리거나, 온몸에 화살이 맞거나, 돌에 맞거나, 무거운 것에 눌려 으스러지거나, 피부가 벗겨지거나, 산채로 묻히거나, 신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던져지면서 죽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아이들이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p.45) 이렇게 마야인들은 이성과 믿음 사이의 균형을 잃고, 입증되지 않은 맹목적 의식에서 모든 답을 구하고자 했다. 마야 제국이 멸망한 외부적 원인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부적 원인은 단순하다. ‘이성과 믿음’, 그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문명도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일방적으로 휩쓸리는 법은 없다. 모든 건 함께 이루어지는 법이다.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소장이나 하버드대학 교수인 야니어 바얌은 그의 저서 ‘메이크 싱즈 워크’를 통해 복잡성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림짐작으로 볼 때, 유기체가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면 유기체의 복잡성이 환경(모든 규모의 환경)의 복잡성과 대등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2016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어디에 와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당연히 살아남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불행하게도 세계의 석학들은 그렇게 진단하지 않는다. 이미 그 경고는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석학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편집한 책 <문명, 그 길을 묻다>에는 제레미 다이아몬드 (총,균,쇠 / 지금까지의 세계 저자)의 확신에 찬 의견이 담겨있다. 그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 ‘1000년 이내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인자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저자 안희경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스티븐 호킹은 틀렸어요.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는 1000년의 시간이 남이 있지 않아요. 단지 50년 뿐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새존을 위한 문제를 풀든지, 아니면 완전히 망치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 이 별을 망쳐놓고 다른 별을 찾겠다고요? 이것은 답이 아닙니다. … 지금 우리별을 망가뜨리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p.21)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자원은 50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곤 “그 어떤 결정일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 가장 마지막에 남이 있을 그 아이를 생각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p.48)고 말했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분명 경계에 서 있다. 지속가능한 문명을 이뤄낼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그저 주저앉고 말 것이냐? 지금은 주위를 돌아볼 시간이다. 눈과 귀를 열어야 할 시간이다. 호흡해야 할 시간이다. 멈춤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마지막 물고기를 잡고서야 돈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는 인디언 속담을 기억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 모두가 말이다.


인간은 마지막 물고기를 잡고서야 돈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3) 믿음과 지식의 균형, 그 시작은 무엇일까?


혹시, 위에서 언급 된 담론이 너무 커 보이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나의 삶으로 치환한다면 어떨까? 실은, 한 문명의 흥망성쇠와 한 인간의 삶은 닮았다. 여기서 돌이켜봐야 할 것은 우리네 삶이다. 다시 말해,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인생의 암흑기’를. 어린 시절 이리저리 읽었던 독서는 차치하고,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시기는 바로 ‘입대 이후’다. 많은 남자들에게 군대는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다. 나에게도 그랬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낯섬과 여유’가 아닐까. 일상에서 떨어진 낯선 공간과 2년이란 시간이 주는 여유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운이 좋게도, 난 책상 앞에서 근무하는 보직을 맡았다. 책을 접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이병과 일병 때, 나는 마음대로 책을 읽었다. 어쩌면 가장 자유롭게 생각하고, 책을 읽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독서량에 스스로 뿌듯했고, 목표도 세우고, 일기도 썼다. 문명으로 비유하자면, 고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철학의 특징은 ‘하나의 사상’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레토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세상의 근본 물질'에 대해서 탐구했고,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성찰했다. 정해진 것이 없었기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기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줄줄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고대 이후, 중세가 찾아온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된 시대. 그리고 중세 시대에 들어서, 앞서 말한 ‘믿음이 지식과 사실을 대신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건 우연히, 어쩌면 필연적으로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상병이 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타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었고, 이어서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과 <지구별 여행자>를 읽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영적인 어떤 것’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구나! 그리고 그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난, 전역 이후론 뭔 뜻인지도 모른 채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뉴에이지 계열의 <람타> 그리고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 (경허 선사의 일대기) 그런 책들을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보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와 생각에 내 모든 일상에 가득 찼다. 그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깨달음’이었다. 나는 깨닫고 싶었다. 하나의 진리를 꿰뚫고 싶었다. 하지만 실은, 깨달음이란 방편으로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보는 편이 무방 하리라. 


나는 2005년에서 2008년을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정의한다. 굳이 문명으로 표현하자면, ‘중세 시대’다. 물론, 전적으로 어두운 것은 아니다. 즐거운 경험도 많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에니어그램’이나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운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은 분명 “치우쳐 있었다"는 것이다. 내 안의 다양성이 꽃 피어나도록 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자아만 활발히 작동한 시기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의 종류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 뉴에이지 책, 종교 경전, 그리고 깨달음에 관한 책만 읽었으니. 게다가 그 권수도 많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어떻게 ‘믿음과 지식’의 균형을 찾고자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까? 사실 거기엔 ‘하나의 믿음에 맹목적으로 경도 된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깨달음을 쫓아 자신의 삶을 버리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고, 위험해 보였다. 내 삶을 위해 시작한 공부가 어느새 '삶을 배신하기 위해’ 쓰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언어가 아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언어다. "니체는 당시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기술하면서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고 보았다. …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27)


시간이 지나, 2009년에 이르러서 난 전공을 포기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지만, 아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1년의 100권을 목표로 책을 읽었고, 빌려보지 않고 모두 구입했다. 스터디를 하고, 수업을 듣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균형’을 찾아갔던 것 같다. 벌써 7년이 지났다. 아직 원하는 수준이 되려면 멀었지만, 균형 감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다시 질문하자. "우린 어떻게 이성과 믿음의 균형을 이뤄나가며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 질문을 품고 함께 공부하러 가자”고. 그렇게 자신만의 질문을 품는 것이 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맹목론자도, 어느 곳에도 답은 없다고 확신하는 불가지론자도 나는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오로지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말하고 생각하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나의 사유 과정을 통해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결코 나 혼자 할 수는 없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그들을 빌려 사유하고, 소개하고, 연결짓고 싶다. 한 달에 1번, 기쁘게 쓰고 싶다. 이제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독물학자가 한 말을 기억하자. 중요한 것은 '균형'이라는 사실을 우리, 잊지 말자.


독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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