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철학 노트, 억압 1편
이 글은 예전 블로그에 썼던 글이다. 약간의 편집을 거쳐 브런치로 옮겨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죄책감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예전에는 정말 '독자'에 대한 고려를 1도 안 했다. 혼자 그냥 벽보고 썼다. 어떤 이상한 글은 화면 가득 7장이 넘어가는데, 지금 내가 봐도 어찌 읽으라는지 모를 정도로 불편하다. 어떤 메시지도 작가와 독자가 만났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인데,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죄책감이 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좀 더 친절하게 편집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일상을 위한 철학 공부>라는 '매거진'을 조금이나마 채우고 싶어서다. 요즘 나의 글쓰기 속도로는 도저히 진도를 뺄 수 없겠더라. 해서, 예전 글을 조금 활용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쓱 옮겨본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평가 김현
책 <싸우는 인문학>에서 이 글은 내게 날아와 깊이 꽂혔다. 문학과 인문학의 '유용적 무용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윗글에서도 특히 이 두 가지 글자에 시선이 간다. 억압. 사전적 의미로 '억압’이란,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른다는 의미다. 요 근래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펼쳐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이 글을 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무엇에 억압당하고 있을까? 이 질문을 한번 품어보자.
억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이 말은 약간의 맥락이 필요한 말이다. 차라리 지금은 '유용함은 무용함을 억압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이야기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들은 베짱이를 억압한다. 너는 왜 일하지 않느냐고, 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베짱이가 자신의 뜻대로 표현하는 몸짓을 단지 무용하다는 이유로 억누른다. 그렇게 베짱이는 억압당한다. 당하는지도 모른 채.
지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겨울 내내 굶게 된다고. 그러니 너도 놀지만 말고 일 좀 하렴.
비슷한 예는 우리나라에 많다. 대학생들은 이제 1학년부터 ‘유용한’ 스펙을 쌓느라 ‘무용한’ 경험들을 뒷전으로 미룬 지 오래다. 고등학생들은 ‘유용한’ 국영수 공부를 하느라 ‘무용한’ 미술 및 음악, 체육 활동을 하지 않는다. 졸업 후 사회에 나오면 다를까? 턱없는 소리다. 이미 우리 사회는 쓸모없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유용함의 '바다’이고, 우린 그곳에서 숨 쉬는 ‘물고기'다. 의미 없는 활동을 무시하다 못해 조소하고 심지어는 타박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은 자신이 머무는 곳이 ‘유용함의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무엇에 억압당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억압하는지도 모른 채.
이것도 한번 생각해보자, '핵심은 주변을 억압한다.’는 말. 신문 기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자의 역할은 사건의 주제가 되는 헤드 라인을 가급적 ‘간결하게’ 다듬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주변 곁가지들은 필연적으로 잘려나간다. ‘핵심만 논하는 것’ 그것은 바쁜 현대인에게 아무렇지 않은, 필연적 일상이 되었다. 즉, 핵심과 본론이 곧 미덕이 된 사회다. 언듯 보면, 이것은 좋아 보인다. 이것이 어떻게 억압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 제목을 보자. '러시아의 젊은 가정주부, 가정불화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다’ 아마 대부분은 시선을 0.1초 정도 머물다가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기사로 쓱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실은 이 기사의 사건이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말한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뭘 놓치고 있는지 보이는가? 알랭 드 보통의 <푸르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나온 예시인데, 참으로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곁가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품고 있지만, ‘사건의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모두 잘려나간다. 그와 동시에 비극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사라진다. 결국 우린 우리도 모르게 삶의 본질 중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른바 신문을 읽는다고 불리는 혐오스럽고도 관능적인 행위.”에 대해서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 덕분에 지난 24시간 동안 우주에서 벌어진 모든 불운과 격변,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가와 배우의 냉정함 등등은, 심지어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우리에게는 일종의 아침 대접으로 변모되며, 아울러 우리는 카페오레 몇 모금을 마시도록 권유받는 것이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5만 명의 전사자들에 대해서도 잊고, 신문을 한편에 던져버리고, 일사의 지루함에 대한 우울의 약한 파도를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나는 이것이 매일 아침 뉴스로부터 우리가 받는 ‘억압’이라 생각한다. 글자 수 40자 제한의 트위터나 페북도 실은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핵심이 아니란 이유로 억압받는 삶의 풍부한 곁가지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나 많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곧바로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이 단순하면 결과도 그렇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실천'이 아니라 '숙고'이며, '본론'이 아니라 '서론'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고 머물러보자. 그것이 우리가 '유용함이라는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임을 기억하자. :)
당신은 무엇을 유용하다고 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