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규암:기억을 엿보는 바위 이야기
스튜디오 안은 시원하다 못해 냉기가 돌았다. 분장을 마친 나는 구석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긴급 진단! 추석 소비자 물가’.
갑자기 편성이 잡혔다는 후배의 부탁에 패널로 나온 참이었다.
“자. 10분 뒤에 녹화 시작합니다. 화장실 가실 분 빨리 다녀오세요.”
깔고 앉은 휴대폰이 웽 울렸다. L이었다.
“전화 무음으로 해주세요.” FD가 눈총을 보냈다.
L이라면 광고 얘기를 할 게 뻔했다. 안 받으면 지명수배라도 때릴 놈이었다.
“왜?”
“야. 광고 언제 줄 거야?”
“지금 녹화 중이야.”
“이름 값 내놔야지. 내 이름으로 칼럼 쓴다며.”
“아 쫌.”
“너 구본희 한테 이른다.”
“누구?”
“너 벌써 치매냐. 의자왕 말야. 구본희.”
맞다. K의 이름은 구본희다. 의자왕 수습 시절이 지나가고 K가 지나가면 몇 명이 장난을 걸었다.
“오늘도 구보니? 오늘은 몇 보?” 이름 갖고 놀리는 사람은 딱 질색 이었다.
나는 K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 않았다.
K에겐 벌써 두 달째 칼럼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엔 풍경 위주로 쓰다가 문화재나 전설, 홍수 같은 재난 이야기도 썼다. 점점 재미가 붙은 나는 업무 시간에도 글감을 찾느라 바빴다.
며칠 전엔 K의 제안대로 나의 이야기를 보탰다. 칼럼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건 처음 이었다. 나는 엿바위의 엿을, 먹는 엿으로 알고 있던 걸 썼다. 내친 김에 대비 둑을 제비 둑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도 덧붙였다.
K가 오랜만에 답장을 했다.
“그래. 이거야.”
칼럼 쓰기가 뻔한 일상의 활력의 되고 있었다. 출근 시간을 1시간 당겨 회사 앞 카페에 에스프레소와 태블릿을 놓고 앉아 있으면 전에 없던 행복감이 솟아났다. 이젠 수면제를 반으로 갈라 먹어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안개가 걷히듯 마음속에 작은 그리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살모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느티나무, 엄마에게 연탄재를 맞고 도망갔던 미루나무 같은 게 생각나더니 재롱이가 있던 복숭아나무 집, 동생이 태어난 자두나무 집은 그대로 있을지 궁금했다. 이게 K가 말한 그 때일까.
포털에서 거리 전경을 찾아보았다. 수풀이 무성하던 강둑은 산책로로 바뀌어 트랙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북정 아래 삼거리와 장터 주변은 어느 공예가의 의지로 몇 년 전 공예마을로 태어났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표 수집을 하던 오빠와 갔던 우체국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들이 보였다. 순정이네가 임시로 살던 장터 안에도 카페와 공방이 있었다. 쥐들과 함께 추곡수매를 하던 공판장은 대형 카페로 바뀌어 있었고, 동네 술꾼들의 실비 집은 원형을 살린 카페가 돼 있었다.
미루나무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살모사와 이야기하던 느티나무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 한일식품이 있던 자리에는 파란 공사 가림막이 보였다. 가림 막의 중간에 글씨가 보였다.
‘Comming Soon’ 이게 뭐지?
며칠 후 방송이 나가고 후배는 회사로 고맙다는 연락을 해왔다. 다신 부르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는 그래도 홍보본부장답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전화를 끊자 바로 다시 전화가 울렸다.
“저기 공정민 씨 세요?”
웬 여자가 나를 찾았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맞지? 맞지? 너 꽁미 맞지?”
“네?”
“야. 아침에 방송 봤어. 아니 돌리자마자 나오는 거야. 처음엔 넌 줄 몰랐는데.”
“저기 누구신지.”
“야. 나 미양이야. 미양이. 알지?”
미양이? 떡집 뚱땡이 미양이?
“너 언제 이름 바꿨어? 너무 반갑다.”
미양이는 주말에 추석 동창회가 있는데 너무 잘 됐다며 연신 까르르 웃었다. 잠시 후 미양이가 보낸 동창회 공지가 모바일 메신저에 떴다. 번호를 우격다짐으로 물어보는 미양이를 당해낼 수 없었다. 공지를 보다가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한일식품은 재준이가 사라진 지 반년도 안 되어 문을 닫았다. 손님이 줄고 곰 선생이 갈수록 쇠약해지자 사모님은 병구완을 한다는 구실로 동네를 떴다. 재준이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그들이 떠난 뒤 한일식품은 건물만 남아 한두 해를 보내다가 강둑 진입로를 정비하며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사모님은 집이 헐릴 때 한 번 왔었다고 엄마가 말했다.
그 후 교류가 끊겼고 얼마 후 그들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내 읍의 아파트에 살다가 15년 전 여행사를 정리하고 동생이 있는 천안에 정착했다. 엄마는 월자 아줌마와 복태 아줌마와는 간간이 연락하며 지냈다. 미양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래. 갈게.”
터미널에 내리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버스가 앞바퀴를 대는 낮은 방지 턱과 자양강장제 이름이 쓰여 있는 나무 벤치, 알록달록한 차양, 대합실의 도끼다시 바닥까지. 나는 족히 5분은 그대로 서 있었다. 터미널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또 서고 말았다. 30년 전, 한밤중에 찾아온 K와 밤새 술을 마시던 해장국집이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몰랐던 상호는 전주집 이었다.
“아직 안 열었슈.”
주방에서 목소리만 들렸다. 기억보다 훨씬 작았다. 테이블은 옹기종기 다섯 개가 전부였고 중국집처럼 벽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장식장에는 허리가 볼록한 인삼주와 뚱뚱한 담금주 두어 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림사지 5층 석탑 모형이 있었다. 그날 K가 주고 간 기념품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한 30분 기다리야는디. 어뜨케, 기다릴라나, 갈라나.”
주방에서 나온 주인 여자가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하던 그 뽀글머리 여자. 다리가 밖으로 살짝 휘었지만 나비 핀을 꽂은 빨간 염색 머리가 경쾌했다.
“아뇨. 잠깐 들어온 거예요. 옛날 거네요.” 내가 석탑 모형을 보며 말했다.
“이 저거. 한 30년 됐지. 옛날이 밤새 술 처먹고 누가 주고 간 겨.”
“네. 그렇군요.”
“얼굴이 익은 디. 서울에서 왔소?”
나는 또 오겠다고 인사한 후 문을 나섰다. 리조트에 체크인을 해놓고 동창회 장소로 가야 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된 둥근 회랑이 반기는 리조트는 온화하고 소박한 백제의 느낌을 잘 살려 놓고 있었다. 주변엔 대형 아울렛과 골프장, 대규모 역사 재현단지도 있었다. 유아차를 앞세운 젊은 부모들이 체크인을 하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물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동창회가 열리는 장어구이 전문점 앞에 내리자 서툰 가을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현관에 들어서며 얕은 현기증이 일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직사각형의 긴 별실 안에 열 대 여섯 명이 벌써 초록색 병을 쌓아가고 있었다.
가운데 반짝이 청재킷을 입은 여자가 일어났다.
“꽁미 왔구나. 나 미양이야.”
길에서 보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시지를 얻어먹던 삼촌 동호는 시내에 공업사를 차렸고 곧 분점을 낼 거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다리가 불편해 살모사 선생의 자전거를 얻어 타던 기범이는 공주의 동물병원 원장이 돼 있었다.
미양이는 떡집을 이어받아 부대찌개 집으로 바꿨지만 코로나 때 접고 지금은 보험을 한다고 말했다.
극장집 딸 미숙이는 남동생이 사업을 한다고 극장터를 날려 먹었다며,
벌써 혀가 꼬부라진 삼촌2 종두가 대신 말했다. 웃기만 하는 미숙이의 얼굴에 풍상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아직 안 온 친구 하나가 있었다. 그 애가 식사비를 내기로 했다고 하자, 모두 그 애의 성공담을 입에 올렸다.
한 친구가 충남의 학교 급식 중 최소 20%는 그 애의 푸드 회사에서 운영할 거라고 하자, 다른 친구가 전라도와 경기도에도 급식 운영을 한다며 모르면 가만있으라고 타박을 놓았다. 둘은 곧 싸울 기세였다.
혹시 그가 아닐까 생각했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영대였다. 도시락을 못 싸 와서 야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부장 선생에게 귀 방망이를 얻어맞던 영대. 못 먹은 게 한이 된 영대는 중견 식품회사의 어엿한 오너가 된 것이다. 악수를 나누며 뜨거운 축하를 보냈다.
“영대야. 멋지다. 축하해.”
“너 그때 글짓기에다 내 얘기 썼잖어. 나 그 때 맘 잡은 겨. 고맙다야.”
나는 또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건물 밖 화장실에 가서 입을 헹궜다. 밖으로 나오자 웬 황소 같은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길영?”
“맞어. 오랜만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미 생각하고 있었어.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경미는 오늘 안 오니?”
그는 발로 땅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애 엄마. 재작년에 먼저 갔어. 직장암으로.”
“뭐?”
“너 온다 길래 얼굴이나 볼라고 잠깐 들렀어. 나 동창회 잘 안 와.”
“아니. 어쩌다가.”
“장인이랑 장모가 1년 차이로 갔는데 병 수발하다 지가 병난 거지. 어쩌겠어. 저기, 너한테 해줄 얘기가 있어. 별 건 아니고.”
“…….”
“그 이브 날 돈 없어진 거 말여. 내가 데려간 친구 두 명 있지.
그 놈들이 그랬다고 하더라. 애 엄마 장례식에 와서 술 먹고 얘기하더라고. 하도 오래된 일이라 어쩔 수도 없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말었어.
그래도 너한테는 알려주는 게 맞을 거 같어서.”
“그렇구나.”
그는 내가 묻지 않은 말도 했다.
“그리고 재준이 말여.”
그의 이름이 들리자 심장이 뚝 떨어졌다.
“미국에 있다더라고.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장인이 우리 아버지한테 하는 얘기 얼핏 들었어. 거기서 대학도 가고 교육 사업인가 해서 돈도 좀 번다고 하더라. 벌써 20년도 전에 들은 얘기라 지금은 모르겠지만 말여. 그래서 네가 좀, 인제 편하게 생각하면 어떤가 해서.”
“그래. 고맙다. 친구.”
친구라는 말에 떡대 이길영의 눈자위가 벌게졌다.
입이 깔깔해 조식은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택시를 탔다. 강둑 마을로 목적지를 눌렀지만 백제교를 지나자 수북정 앞에서 내리고 말았다. 수북정에 오르자 강둑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리 뷰에서 본 대로 붉은 우레탄 트랙이 산뜻했다. 백마강은 강폭이 줄어 어린 시절 바다 같은 장엄함은 찾을 수 없었다.
수북정에서 내려오자 카페와 공방들이 막 잠에서 막 깨어나고 있었다. 내 발길은 그 곳, 한일식품 자리로 향했다. 공사 가림 막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카페인 듯 했다. 실내는 온통 짙은 우드 톤이었다. 문득 곰 선생의 서재에서 본 그 빛깔, 황목으로 만든 서안이 떠올랐다. 입구 안쪽으로 간판을 덮어놓은 흰 천이 아침 바람에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카페 이름은 세 글자였다. 뛰어 들어가려는 나를 인부 한 사람이 막았다.
곧바로 터미널에 가서 가장 빠른 서울행 버스를 탔다.
간판에는 ‘카페’와 나머지 글자, 피핑록이 있었다.
영어를 좋아하던 그를 놀려대느라 장난스럽게 지어낸 엿바위의 영어 이름. 피핑록은 내가 만들었다.
어디서도 그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한편으론 공예마을이 들어서며 누군가 지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 혼란스러웠다.
서울에 도착하자 곧장 부암동으로 갔다. 입장권을 사서 데스크를 지나 그 앞으로 갔다. 먼저 온 사람이 보여 잠시 기다렸다. 그 그림은 정면에 서서 혼자 보아야 제대로 보였다. 번잡한 관계의 꼬리들을 쳐내고 났을 때, 또는 인연의 깊은 골짜기에서 시린 바람이 불 때 나는 그 곳으로 갔었다.
멀리 뉴욕에 있던 화가 김환기는 이웃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던 김광섭의 부고를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그와의 못다 한 우정을 떠올리며 김광섭의 시 마지막 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김광섭은 살아 있었다.
부고는 오보였다.
시의 마지막 행은 그림의 제목이 됐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김광섭의 시 ‘저녁에’가, 자신이 태어나던 1969년에 쓰였다고 재준이가 말했었다. 이 그림은 내가 태어나던 1970년에 그려졌다. 재준이도 이 그림을 보았을까. 푸르른 우주의 수많은 점 중에 우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너와 나의 점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반드시 나를 찾겠다고, 푸르른 그는 말했었다.
우리는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주택가 쪽으로 호젓하게 자리 잡은 미술관은 좀처럼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큰 길까지 나오자 택시 한 대가 달려왔다. 먼저 서 있던 남자가 손을 들어 택시에 탔다. 앞서 그림을 보던 남자였다. 나는 좀 더 걷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L은 세찬 비가 오는데도 회사 근처로 찾아와 기어이 광고 집행계약서를 쓰고 갔다.
L이 남 은 커피를 마시며 K 이야기를 꺼냈다.
“구본희 말이야. 열두 살 때 엄마 돌아가시고 1년도 안 됐는데 아버지가 재혼을 했대. 계속 겉돌기만 하니까 구본희랑 여동생을 청주 이모네로 보냈다는 거야. 다섯 살 동생을 데리고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겠냐. 그래서 걔가 좀 그래. 좋아도 좋다고 못하고, 부탁도 못하고 말이야. 누가 적의를 보이면 더 세게 방어하지.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거지. 아오. 천하에 귀찮은 새끼.”
L과 헤어지고 돌아오다 건물 사이에서 비를 맞으며 떨고 있는 새를 보았다.
문득 K도 내게, 저 비 맞는 새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구원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존재 이외에 어떤 목적도 없어야 했다.
어느새 열 번째 칼럼을 보냈다. 규암 나루터에 유람선을 타고 와 사진을 찍던 일본인들, 나루터 앞에서 손이 곱도록 땅콩을 팔던 강둑 사람들의 굳센 생명력을 썼다. K가 사흘 후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해장국집에서 내가 했던 말과 정림사지 5층 석탑 모형에 대해 물었다.
K는 지난 일이라며 말을 아끼다가 내 채근에 입을 열었다.
“네가 글을 쓰고 싶다고 했어. 자긴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고. 똑같은 이야길 계속 해서 기억하고 있었어.”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내가 글 이야기를 했다니 말이다.
“그럼 그 말을 기억하고 나한테 연락한 거야? 칼럼 쓰라고 말이야.”
“이렇게라도 시작하면 좋겠구나 생각했지. 많이 늦었지만 말이야. 그리고 석탑은……뭐랄까. 떨어져있는데 붙어있다고 해야 하나. 각자 다른 돌인데 하나로 연결된 모습이 신기해서 너에게 주고 싶었어.”
김환기 그림 속의 무수한 푸른 점들이 떠올랐다.
“참.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다. 공정민.”
“뭔데.”
“너 원래 이름이 뭐냐? 이름 바꿨다고 했잖아.”
“갑자기 그건 왜?”
“누가 꼭 물어봐 달래서.”
”누가?”
“우리 사장.”
“그 사람이 그걸 왜 물어?”
“너 혹시 공미, 공미 아니니?”
내 원래 이름은 공미다. 오로지 아름답게 살라는 뜻으로 아빠가 딱 한 글자만 지었다.
K의 사장은 한국에 갔다가 두 달 만에 LA로 돌아왔다. 칼럼을 온라인에는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다. 봤다 해도 L의 이름이었다.
LA 신문사로 돌아와 칼럼을 보았고 K를 불러 내 이름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은 웹사이트에 나와 있지 않았다.
K가 처음 말해준 이름은 다니엘 리 였다.
K가 다시 취재해 온 그의 원래 이름은 '이재준'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