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안녕!
전편: #8 공개수업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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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한 달 정도 앞두고는 체력이 바닥이 났다. 입에는 항상 하품이 걸렸고, 눈 밑에는 진한 다크써클이 자리를 잡았다. 원래도 어두운 낯빛은 더욱 흙빛이 되어갔다. 살아야 했다. 카드 할부로 대량의 약을 구입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다보니 어느덧 아침에 먹는 약은 6가지 종류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를 닦고, 기계적으로 센트롬 종합비타민, 밀크씨슬, 비타민D, 오메가3, 유산균, 홍삼의 순으로 약을 집어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피로의 노예가 된 듯 느껴졌다.
“내가 6학년 담임을 하면서 가장 최상의 목표로 삼는 것은 아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해주는 거야”
우리 6학년 부장선생님의 지론이었다. 많은 부분 동의했다. 다만, 추억의 탄생은 일상적인 일과로는 부족했다.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벤트는 나의 체력과 시간을 원료로 삼았다. 체력이 바닥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약으로 체력을 연명하면서도 이벤트를 놓지 않았던 원동력이 있었다. 하나는 아이들과 쌓여가는 래포였고, 또 하나는 6학년 여섯 분의 동학년 선생님들이었다. 사실 이벤트를 기획하고 선물한다는 것이 선생님들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것 일수도 있다. 일단 귀찮은데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어서 하는 거니깐. 솔직히 나도 이벤트 몇 개는 안하고 싶었다. 만약 혼자였으면 못했고,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하니깐, 서로 응원해주니깐, 먼저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나서니깐 덩달아 의욕이 생겼다. 그때도 전했지만 또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벤트가 있다. 학교에서 하는 야영이었다. 학교에서 1박2일 야영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를 쳐다보던 눈빛들이 기억난다. 말로 전하진 않았지만 눈빛으로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해...’
처음 그 눈빛을 받았을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왜 그런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는지. 기억에 남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혹은 그만큼 개고생이었다. 물론 학교 야영은 둘 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살짝, 이제와 말하면 아주 살짝 더 강하다. 피로회복의 어벤져스 모닝 6약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하루 14시간의 숙면에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후유증이 일주일 동안 강세를 떨쳤던 극한 피로의 정점을 찍어주었던 이벤트. 바로 학교야영이었다. 특별히 군대에서도 서지 않았던 불침번을 섰다는 게 사무치게 기억이 남는다.
그래도 이러한 이벤트들 덕분에 아이들과의 사이가 말도 못하게 가까워졌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느 날 문득 우리 반 회장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얼마나 깊은 래포가 생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형이라고 부르면 죽여 버린다고 답했다.
아이들과는 매일 새로운 일상을 쌓았다. 혼나고, 혼내고, 티격대격하면서도 참 즐거웠다. 1학기가 끝나지 않길 바랐다. 그렇다. 사실 이건 뻥이다. 아무리 즐거워도 여름 방학은 빨리 와서 늦게 가길 바라는 반가운 손님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여름방학은 징하게도 천천히 다가왔다. 기다림의 한계가 거의 바닥날 즈음에서야 여름방학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만날 날이 되도록 천천히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우리는 잠시 서로를 떠났다. 무더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금요일에 여름방학식을 하고 딱 토요일, 일요일 이틀만 놀았다. 여름방학이지만 편히 쉴 수 없던 2가지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연구보고서 작성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원 수강이었다. 대학원 발표과제를 준비하고 동시에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름인지라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에어컨이 없어 팬티바람으로 선풍기만을 부둥켜안은 채 열난 머리를 식히는 일은 더욱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연구보고서 작성은 내가 계획한 첫 목표였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보고서를 쓰는 데 있어 첫 번째 차례는 사전 연구물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여름방학 전에 근육질 선생님으로부터 전체적인 보고서 작성에 대해 지도를 받았다. 사전 연구물을 통해 무엇을 분석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작년에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연구보고서를 10편정도 출력해 여기저기 밑줄을 치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떠한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어떤 양식을 사용해야 하는지 공통점을 찾았다.
그렇게 뼈대를 구축하는 데에만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것도 머릿속에 지어진 가상의 뼈대였다. 빈 화면에 실체를 구현해내는 일은 더욱 난관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쉬울 것 같은데 정작 타이핑을 하려니 도통 진도가 않나갔다. 여름방학은 벌써 절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마감은 범인(凡人)을 천재로 만든다.’
서양속담 아니다. 동양속담도 아니다. 그냥 내가 만든 말이다. 마감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여름방학의 끝은 내심 스스로 정해놓은 마감일이었다. 마감일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결과물이 없으니 점점 천재가 되어갔다. 궁지에 몰린 천재가 되니 그제야 뭔가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양식을 완성하는데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달력을 보니 여름방학은 한 열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양식을 완성한 뒤부터 나름 수월했다. 어떤 인성교육을 했는지 기억을 되살리며 내용을 기록하고, 사진을 찾아 삽입했다. 나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차츰 속도감이 붙고, 내용이 풍부해졌다.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이왕 고생하는 거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내친김에 상까지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하던 쪽수는 70쪽 정도였다. 이제 70쪽으로는 부족했다. 딱 100쪽 정도로 스케일을 늘렸다. 스케일을 늘린 만큼 모든 시간을 연구보고서 작성에만 할애했다. 광주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신 날에도 서재에 틀어박혀 키보드를 두드렸다. 거의 미쳐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구보고서 작성기준안을 보게 되었다. 응? 이게 무지.
아.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생도 의미가 있어야 참고 버틸 수 있다. 지금껏 했던 고생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연구보고서 작성기준안을 이제와 확인한 건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내 살과 다를 바 없이 느꼈던 40쪽 이후의 쪽수들을 도려내는 작업을 했다. 늘려놨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고생이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이제는 계획서를 철저히 본다. 텍스트를 꼼꼼히 읽지 않고 대강 훑어 읽는 것은 나의 단점이었다. 역시 사람의 단점은 그 단점 때문에 개고생을 해봐야 고쳐진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이다.
연구보고서는 여름방학의 끝을 하루 앞두고 애당초 생각했던 완성도에 가까워졌다.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나니 그제야 좀 쉬어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뭔가 기분 좋은 꿈틀거림이 가슴에 차오름을 느꼈다. 요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와 같은 책들이 유행한다. 너무 고단한 현실 앞에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나는 온전히 책 제목에는 반대한다. 열심히 사는 것은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뭔가 쥐어지지 않아도 좋다. 한 번쯤 열심히 살아보는 것.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