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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24. 2019

#8 공개수업 망했습니다.

완전 똥망

전편: #7 담임이 처음인지라.

https://brunch.co.kr/@simon1025/9




3할. 딱 3할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반응에 비추어 혹은 나의 개인적인 만족도에 비추어보았을 때 70%의 수업은 망했다는 느낌이었고, 이것저것 끌어 모아 30%정도 나름 괜찮은 수업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야구선수가 3할이면 좋은 타자로 인정받지만 교사로서 3할의 타율은 어디 내어놓기가 부끄러울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쉽게 계산해보면 6교시 수업이라면 반올림해서 2개 수업 정도만 성공했다는 뜻이니깐.


수업준비를 대충 하지는 않았다. 3시 정도에 아이들을 하교 시키면 4시 30분 퇴근하기 전까지 거북목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수업자료를 찾고, 내일의 시나리오를 그렸다. 준비할 때는 나름 ‘이 수업은 실패할 수가 없는 수업이다.’ 싶은데 막상 내일이 되면 ‘이 수업은 망할 수밖에 없는 수업이었다.’가 되기 일쑤였다. 초등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면 한 일주일 정도만 담임이 되어 국어,수학,사회,과학,영어,도덕,미술,음악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쉽지 않을걸.

나도 홈런 같은 수업하고 싶다

그래도 우리 반 아이들은 내 수업에 참 즐겁게 참여해주었다. 예쁜 녀석들. 이제와 아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더불어 잘 배웠어야 할 6학년에 날 만나 어설프게 배웠을 것에 대해 미안함을 전한다.




5월이 되었을 즈음 반갑지 않은 소식 하나를 들었다. 학부모 공개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난 학부모 공개수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공개수업을 준비는 했었으나 과학 전담인지라 학부모님이 아무도 오지 않았었고, 복직한 이후에는 날짜가 애매해서 면제를 받았었다. 결국 언젠가 하긴 하겠지 하면서 미뤘던 첫 학부모 공개수업일이 진짜 눈앞으로 다가오니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과 걱정이었다.


감시받지 않고, 평가받지 않는 평소의 수업에서는 실패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의 스트레스와 ‘많이 부족하네!’ 정도의 반성 정도 마음에 머물다 갈뿐이었다. 그런데 공개된 수업에서, 학부모님들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 수업에서 실패를 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수치심은 인간 의식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하며, 심리치료 시에도 가장 오래 치료해야 하는 감정이라고 데이비드 호킨스가 말했다. 그러한 수치심이 나의 전두엽에 들어앉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도저히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수업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6학년은 공개수업을 공통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하나 된 마음으로 실패하지 않을 수업에 대해 고민했다. 과목은 국어로 정했다. 처음 디자인했던 수업은 연극 수업이었다. 모둠마다 주제를 정해 공익광고를 구성하고 연극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그렇게 수업을 설계하고 나서 영 잠자리가 시원치 않았다. 몸이 본능적으로 실패를 직감했던 걸까. 다시 생각해보니 공개수업 때 연극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서둘러 수업의 방향을 꺾었다. 공익광고를 미리 찍어놓고, 공개수업 당일에는 이를 상영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번에는 진짜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공개수업 전날에는 잠을 거의 못 잤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일찍 자기 위해 초저녁부터 불을 껐는데, 머릿속은 오징어배의 조명마냥 환희 빛났다. 새벽 1시, 2시가 지나도록 이놈의 잠은 도통 올 생각을 안했다. 잠자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 했다. 머릿속에 날파리가 날아다녔다. 누웠다, 일어났다, 돌아다녔다, 물 마셨다를 반복했다. 새벽 3시쯤 되니 슬슬 조바심이 났다. 나는 잠에 취약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다음 날 묵중한 피로감으로 컨디션 난조에 시달린다. 필사적으로 잠자기 위해 노력했다.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잠은 어느 틈에 갑자기 왔다. 갑자기 와서 잠시 머물다 금방 갔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숙취에 시달리는 듯 머리가 무거웠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었다. 검은색을 입고 있으니 상갓집에 가는 울적함이 들었다. 출근하는 길에는 걱정, 두려움, 막막함, 떨림, 한숨, 두통과 같은 것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분 나쁜 회색빛 존재들이었다.


공개수업은 3교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1교시, 2교시에는 아이들에게 유례없는 친절함을 선보였다. 성공적인 공개수업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과는 2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조금 소란스러워 되니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해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암호였다. 아이들에게도 공개수업은 부담스럽다. 평소 자신의 수업태도가 어떻든 부모님이 와있는 상황에서는 평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그들만의 고충이 있다. 그러한 그들의 부담감과 나의 부담감을 합쳐 만든 것이 암호였다. 암호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왼손을 들고 “발표해볼까요?”라는 물음을 던지면 암호가 시작된다. 암호에 따라 아이들은 모두 손을 들어야 한다. 단, 정답을 알겠는 사람은 손을 쫙 편 채로,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주먹을 쥔 채로 손을 들면 된다. 내가 손을 쫙 편 아이를 발표시키면 다른 아이들은 아쉬운 듯 탄식을 한 번 내쉬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한다.

이런 눈빛?



천재적인 암호였다. 들킬 위험이 없으며, 아이들에게도 Win 나에게도 Win이었다. 아이들은 암호를 환영했다. 우리만의 비밀이 생기니 괜히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3교시가 가까워지자 손이 차갑게 식었다. 입술에 침이 말랐고, 헛기침이 자주 나왔다. 2교시와 3교시 쉬는 시간에는 오디션을 앞둔 참가자처럼 머릿속으로 계속 수업상황을 복기했다. 대사 한 마디, 미리 준비해놓은 애드리브, 시간, 준비물 등을 점검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실패는 없었다.


“박수 한 번 치고 시작할까요?”


의미도 없고, 맥락도 없는 조촐한 한 마디와 함께 공개수업을 시작했다. 교실의 밀도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나, 아이들, 학부모를 포함해 약 40명 정도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어색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치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되기 전의 그 오묘한 분위기와 비슷했다.


수업은 흥미로운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그 차례를 시작했다. 시간이 참 더디게 갔다. 동영상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생각과 느낌에 대해 물었다. 물론 왼손을 들었다. 암호였다. 아이들은 긴장했는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땀이 등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자자 긴장 풀고 다시 한 번 누가 이야기해볼까?” 제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손을 들어주길 바라며 재차 물었다.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다행히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발표를 해주었다. 그리고 더 손을 드는 아이는 없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아직도 35분이나 남아있었다.




첫 번째 활동지를 나눠주고 교실을 순회했다. 평소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의견을 나누었을 아이들이 목소리에 공기를 가득 품은 채 소곤거렸다. 한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생님 왜 이렇게 긴장하셨어요?”라며 정곡을 찔렀다. 실패의 검은 그림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듯 했다. 활동지를 발표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손을 드는 아이는 없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활동부터는 찍어놓은 영상을 감상하는 시간이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이들의 코믹스러운 연기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이때다 싶어 애드리브를 많이 날렸다. 만족스러운 반응이 이어졌다. 그러다 애드리브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세 번째 활동을 할 시간을 잡아먹었다. 마지막 모둠의 영상까지 보고 졸속으로 수업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종합하자면 공개수업은 완연한 실패였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실패.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배움의 기회를 삼으라고 가르쳤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캐럴 드웩 교수가 저서 ‘마인드셋’에서 그랬고, 연세대학교의 김주환 교수가 저서 ‘회복탄력성’에서 그리 말했다. 사실 난 실패를 두려워하고 배움의 기회로 삼아본적도 없었다. 그냥 앵무새처럼 그들의 말을 따라한 것이었다.



새삼 자신이 설파한 그대로 살았던 불굴의 계몽주의자 칸트가 대단히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조언 혹은 충고해주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리 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조언을 쉬운 듯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공개수업의 실패가 나에게 준 배움이었다.
존경해요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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