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나는 너희가 민주주의를 못 견딜거라고 봐.
오래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에피소드를 풀어보면,
초등학교였는데, 총학생회에서 안건이 올라와서 교사들이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총학생회의 회의 결과로 나온 것은 '화장실 변기가 자주 막힌다'는 것.
회의 결과가 몹시 귀여웠는데, 소시적 학생회 경험으로 추정해 보자면, '반드시 안건을 내야 해서' 만들어진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큰 문제도 아니고,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문제였다.
캠페인, 화장실 사용수칙 부착, 휴지 종류 변경, 배관점검, 수압조절, 정화조 이상유무 점검...
교사들의 회의 결과는 놀라웠는데,
교사들 : 휴지를 자꾸 갖다 넣어서 그런 거니, 롤휴지 디스펜서를 없애자.
학생과 나 : ....
실제로 바로 그날, 전교 화장실의 휴지가 사라졌다.
이것이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 발생한 만주적 의사진행과 그 결과이다.
아이들이 뭘 배웠을까?
민주시민교육법이라는게 발의되었다고 한다.
법의 주요내용을 살펴보자면, 그냥 민주시민교육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지원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수준이라 좋다 나쁘다를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다만
교사들의 민주시민역량은
좀 걱정스럽다.
학생들의 학생회 활동이나 학급회의, 학생부 활동, 학교 선거 등등의 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이미 존재하지만, 이것들의 효용감을 느끼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학교에서 학생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과의 간담회 (그것도 교사가 시간과 장소와 용건을 정하는) 수준이고, 학급에서 반장, 부반장 또한 선출직이지만 그들의 유권자(학생)를 위해 뭔가 행동을 하는 것을 기대하는 학생은 없다시피 한다.
가장 훌륭한 민주시민육성방안을
이미 시행하고 있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교사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요구나 활동도 '평가'하고 이것을 '관리'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샌드박스라는 개념으로 좋게 이해하 보려고 해도 우리의 학교는 너무나도 학생끼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고작해야 건의사항에 불과한 안건이 학생회를 통과하여 교사들에게 전해지면 (그것도 아주 가끔) 교사들이 그것을 '판단'하여 맘대로 결론을 내어 버리는 짓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생기부 작성에 유리한지를 따져 선출직 반장이나 학생회장에 출마하고, 당선되고 나서도 그.누구도 (심지어 스스로도) 학생들의 입장이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민주주의는 망한 것이다.
민주시민교육법이 시행령단계나 각 시도교육청마다의 계획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지는 모르겠다.
다만, 민주시민을 육성하고 싶으면 학교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수업, 성실성, 태도, 툭정 사건 등에 대해 학생회가 입장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시험문제 오류, 수행평가, 서술형 답안 채점 등 학생에게 중요한 부분에 대해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폭력, 안전문제 등에 대해 '건의'가 아니라 '같이 논의'하는 학교 운영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현장체험학습, 소풍, 체육대회 등의 수업 외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교사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 할 것 같다.
시험문제에 심대한 오류를 낸 교사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학생회를 교사들이 참을 수 있을까?
현장체험학습의 장소와 일정을 논의하는데, 미숙한 경험이나마 이런 저런 의견을 내는 학생들의 말을 들어주고 윽박지르지 않고 설득할 수 있을까?
학폭문제의 처리방식에 학생회의 항의가 있으면, 이것을 설득하거나 수용할 수 있을까? 무시하거나 화내지 않고?
특정 교사의 행동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가 접수되면, 이를 해명하거나 행동을 수정하거나 필요시 수업을 배제하거나 할 수 있을까? '건방지다'는 생각없이?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다.
'누구나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민주주의는 여러 주장이 부딪힐 때 비로소 시작된다.
서로 다른 생각이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전제이며, 그 차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민주주의의 수준을 결정한다.
민주주의란 각자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주장들 속에서 공동체에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경청, 근거 제시, 타협,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이 포함된다.
학교는
학생이 처음으로
‘사회’를 경험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학생이 체험하는 민주주의의 수준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사의 행동에서 시작된다.
교사가 다른 의견을 어떻게 대하는지, 권위를 근거로 말을 막는지 아니면 논리로 설득하는지, 비판을 불편해하는지 아니면 환영하는지에 따라 학생이 배우는 민주주의의 모습이 달라진다.
만약 교실에서 의견이 다른 학생이 위축되고, 질문이 귀찮은 것으로 취급되며, 결정 과정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학생이 배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순응의 기술’이다.
반대로 교사가 자신의 판단에도 이유를 설명하고, 학생의 반론을 존중하며, 잘못된 결정은 인정하고 수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학생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실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민주주의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과목이 아니라, 어른이 보여주는 태도의 총합이다.
학생은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권한을 사용하는 방식 속에서 민주주의의 기준선을 설정한다.
교사의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학생에게는 ‘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만주주의를
'보여줄' 역량이 없다고 생각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