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안 돼. 여행 가면 왜 다들 그렇게 싸울까
이해 안 돼.
여행을 가면 왜 다들 그렇게 싸울까.
귀한 시간을 내고 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 좋기만 해도 바쁠 시간에 왜?
그 이해 안 되는 행동을 내가 해버렸다.
히베이라 광장에서 랠루서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운동복 차림의 한국인 두 명.
우린 포르투의 시내 한복판에서 그렇게 갈라서서 각자의 여행을 시작했다.
포르투의 마지막 이야기 시작.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https://youtu.be/yz9mAxCvRIw?si=nHO_t_Fti3nUwxgj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강변 달리기를 상상하곤 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비교적 여유로운 포르투갈에서는 꼭 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조거팬츠, 맨투맨, 러닝화를 가져왔다.
오늘이 그날이다.
씻지도 않은 채 운동복 차림으로 핸드폰과 블루투스 이어폰만 챙겨 나왔다.
런데이 어플을 켜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운동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35분 달리기 시작.
아무런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편한 복장으로 나온 강변은 또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왜 한껏 꾸미고 배회하는 관광지일 때보다 편한 차림으로 다닐 때 포르투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질까?
볼에 닿는 적당히 차가운 초겨울의 날씨가 유독 상쾌하게 느껴진다.
뛰어가면서도 이런 풍경을 놓칠 수 없어 사진을 찍으며 연신 달린다. 숙소에서 조금 나온 게 다인데 이런 곳을 내가 달리고 있다니. 많은 세계 여행자들이 그리워하는 도시 포르투에서 관광이 아닌 달리기를.
이해가 안 된다.
여행을 가면 왜 다들 그렇게 싸울까. 귀한 시간을 내고 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 좋기만 해도 바쁠 시간에 왜 싸우는 걸까
그 이해 안 되는 행동을 내가 했다.
시작은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하다.
"이제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
"여기로 가야 돼"
"아니야 내가 아까말한 곳 가려면 거기 아닌데?"
"아까 거기 간다며?"
"아니야 거기"
오늘이 포르투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이다.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서 재밌는 것들을 잔뜩 계획하고 들떠서 공유를 했는데 틀어져버렸다는 사실만으로 속상했다.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기대자체는 문제가 되질 않는다. 더욱 알찼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마음.
히베이라 광장에서 랠루서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운동복 차림의 한국인 두 명.
우린 포르투의 시내 한복판에서 그렇게 갈라서서 각자의 여행을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고 개운하게 한식을 먹고 돌아와 씻을 생각이었던 나는 갑자기 도심 한가운데서 관광을 시작하게 됐다. 늘어난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 하나만 가지고.
이번 16박 17일 여행 계획을 모두 내가 짠 덕분에, 현지에서는 동행이 교통편과 돈관리 등 가이드를 도맡았다. 나는 믿고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고 신경을 끄고 있었다. 여기선 돈 계산도 해본 적 없는데
내가 그간 동행 덕분에 얼마나 편하게 여행했는지 깨닫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도심에 예상치 못하게 내버려진 나는 갑자기 위축됐다. 잔뜩 긴장하고 기가 죽은 모습을 귀신 같이 알아보는 일부 현지인은 휘파람을 불고 건들거리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긴 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그래 이 참에 오늘은 혼자 여행해 보는 게 어때.
이따 16시가 되면 2022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 전이 열린다.
포르투갈에서 보는 포르투갈전.
말만 들어도 흥미로운 상황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직 밖을 배회중인 나는 핸드폰으로 인터넷 창을 켜 네이버 실시간 중계에 접속했다. IP 때문에 접속 불가. 티빙, 웨이브 ott 도 모두 접속할 수 없었다. 유튜브에서는 축구 중계가 아니라 축구를 중계를 보는 리액션을 중계하고 있었다. 어쩌지
그래 이 구닥다리 해외 유심으로 실시간 축구 중계를 보는 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포기하고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와이파이로 보자. 다시 다리를 건너 숙소로 가는 거야'
아직도 로딩 화면이 떠있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숙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숙소로 가려면 사람이 가장 많은 히베이라 광장을 다시 지나가야 한다.
히베이라 광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은 가게의 작은 tv화면을 향해있다.
늘어선 가게를 지날 때즈음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 해설과 현지인들의 환호성이 뒤섞여 들린다. 안타까워하는 반응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뭐지 벌써 골이 들어간 건가? 아깝다는 뜻인가? 무슨 상황이지'
애타는 나는 더욱 빠른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할 뿐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피자헛에 들러 피자를 한판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어색하면서도 반나절 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기류. 서로 감정이 완화됐음을 그 즉시 느낄 수 있는 공기.
내 손에 들린 피자와 화해의 낌새가 반가웠는지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빠르게 그릇을 세팅하고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 우리 이제 화해한 거지?
아무런 기대 없이 피자 먹기에 집중하던 포르투갈전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이미 마음은 다 풀렸지만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황희조 선수의 첫 골이 들어간 순간 우리는 일어나 함께 방방 뛰었다.
'미안해' '아냐 내가 더 미안해.'
한마디 말없이도 서로의 마음이 녹았음을 말없이도 알 수 있었다. 경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김영광 선수의 역전골이 들어갔고 경기종료는 채 10분을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발 제발.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맞대고 붙어있다.
한국의 2:1 역전승 확정. 하지만 16강 진출 확정은 이르다.
마지막 경기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 중계화면으로 비치는 한국인들의 긴장한 모습, 선수들.
중요한 부분에서 계속해서 끊기는 중계화면은 우리의 마음을 더 애태웠다. 10초에 한 번씩 영상이 끊어진다. 영상이 아니라 사진 몇 장을 이어서 보여주는 것 같은 기가 막힌 매끄러움. 핸드폰 두대, 태블릿 한 대를 동원해서 모두 함께 돌려도 역부족이다.
드디어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우리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얼싸안고 응원가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광란의 203호다.
아니다 여기서만 이러고 있을게 아니지.
"우리 나가서 바람 쐬고 노을 보자!"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채 급히 밖으로 나왔다.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씩 붉은 악마 응원가를 나눠 들으며 강변을 달렸다. 달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강변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적당히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포르투는 이래서 좋다. 사람이 많진 않지만 적당히 설렘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늘 있다.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경기를 본 오늘.
크리스마스 & 월드컵 기간에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한순간도 놓치기 아까운 동루이스강의 야경을 배경으로 비긴어게인 포르투갈 버스킹을 보며 마지막 밤을 마무리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세비야, 여기 포르투 까지. 참 긴 여정이었다.
긴 유럽여행에는 낭만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장거리 비행 후 연이은 16박 17일의 여행은 정말 고되다.
보통 이런 과정으로 지옥의 여행일정이 완성된다. 여행 카페에 가입한다.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를 모조리 검색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추천하는 코스를 일정에 넣고 추리다 보면 굉장히 빡빡한 여행 일정표가 완성된다.
표는 100점 현실적으로는 50점.
한국으로 치면 3일은 부산, 2일은 여수, 3일은 강원도 이런 식으로 이주 넘게 여행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마다할 여행을 유럽만 가면 왜 그리도 더 말도 안 되게 부지런한 여행을 하는 걸까? 일정을 계획할 때는 내가 그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또 성당이구나.... 이젠 뭐가 다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세비야 성당에 갔을 때도 더 이상 감흥 없이 의자에 앉아서 빨리 나가고 싶었을 정도.
지쳐있었다. 여러 번의 지역, 숙소 이동. 매 끼니마다 밥을 어디서 먹을지 구글리뷰와 카페 후기를 수차례 뒤져야 하고, 갈 곳을 고민하고 지도를 봐야 하고, 감흥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 포르투에 오기 전까지는.
포르투는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냥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다음 날 씻지도 않고 운동복을 입고 동네를 배회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2년 동안 기다렸던 노을 지는 히베이라 광장을 봤을 땐 환상 속 존재를 확인한 것처럼 황홀했다.
스페인에서부터 우릴 따라다니던 지독스러운 인연을 이곳에서 계속 만나 집에 초대를 했고, 동루이스강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대낮부터 오렌지를 까먹고 포트와인을 마셔 취한 채 낮잠을 잤다.
강변을 따라 달리기를 하고, 밤이 되면 다리에 올라가 포르투의 일렁이는 야경을 감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반짝이는 강변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야경을 보며 조촐한 와인 파티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낭만을 5일 동안 포르투에서 맛보았다.
좁은 방 안에서 나오길 싫어하고,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던 나는 이곳에서는 알람이 없이도 곧잘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서 빨리 그림 같은 강변을 보고 싶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마치 이곳에 살던 사람인처럼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뭐가 그리 문제라고 왜 그리도 힘들어했는지, 스스로를 가두고 지치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참 좋았다.
번아웃으로 퇴사 후 무기력증에 빠졌던 나는, 내가 사는 네모난 방안이 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다.
장장 17시간을 걸려 떠나온 스페인, 포르투갈은 넓디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이 전부 부질없음을, 매우 사소한 것들이라고 증명하듯 수많은 사람과, 갖가지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록.
나의 포르투 끝. 여행의 끝으로 달려가는 리스본 시작.
지금까지 포르투갈 포르투 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