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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디 Oct 17. 2023

#13 아무튼 우리 이번에는 꼭 같이 밥 먹어요.

평범한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한 가지

사람은 세명, 라면 4개.


낯선 이의 등장에 조금 들뜨고 긴장한 나는, 느리디 느린 하이라이트에 냄비 물이 채 데워지기도 전에 면을 넣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를 반기는 우동 면발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https://youtu.be/lVISeGcRvUg?si=fJkPcgBa816q0axr





저녁노을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 작은 상점에서 바깥에 진열해 놓은 포르투 엽서들을 고르고 있었다. 동루이스 강을 찍은 엽서를 두 개 집어 들어 비교하고 있던 중, 엽서 너머로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설마.


큰 키에 손흥민을 닮은 그 사람은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어젯밤 우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그 사람, 정오였다.


포르투에 도착한 뒤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또 마주쳤다.


"형! 정오 형!"


내 동행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한 잔 한 듯 알딸딸해 보이는 이 남자는 평소에는 하지 않던 스킨십까지 서슴없이 하며 들뜬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아까 모루공원에서 보고 온 노을이 너무 환상적이었다며 들뜬 모습으로 조잘댄다.


"우와 이 분들 이래! 정오님이 얘기했던 여행 내내 마주친 분들"

"진짜 신기하다.."


떨어져 서있는 일행 두 명은 말로만 들었던 인연을 또 마주친 장면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연신 신기해한다. 이 사람도 우리 인연이 어지간히 신기했나 보다. 한인 민박 사람들에게 우리 얘길 한 걸 보니


"아무튼 우리 이번에 포르투에서는 꼭 밥 먹어요. 먹어야 돼 이건"


이 운명적인 만남을 종지부 찍기 위해 그를 내일밤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왜 그리도 우린 자주 마주쳤을까?






사람 세 명, 라면 네 개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 그리고 수도 없이 마주쳤던 그 사람이 우리 숙소에 오는 날이다.


여행자인 우리가 숙소에 손님을 초대하고 청소를 하고 있으니 마치 진짜 살고 있는 집의 집들이를 하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 집에 반했던 이유인 창문을 다 열어서 동루이스의 야경을 보여주고, 창가에는 로맨틱한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는 태블릿을 올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역시 포르투의 강변은 오늘도 이쁘다. 내일이면 여기를 떠나야 한다니




배달의 민족도, 늦게까지 문을 여는 음식점도 없다.  


낯선 타국에서 내가 그에게 대접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최고는 한국 봉지 라면이다. 일주일 넘게 먹은 양식에 질린 우리에겐 라면 한 봉지가 토마호크 스테이크보다 소중하다. 특별히 오늘은 그와의 인연이 특별하다는 걸 동의하듯 라면을 하나 더 끓였다.


사람은 세명, 라면 4개.


낯선 이의 등장에 조금 들뜨고 긴장한 나는, 느리디 느린 하이라이트에 냄비 물이 채 데워지기도 전에 면을 넣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를 반기는 우동 면발






여행에 꼭 필요한 단 한 가지



 우리의 행복했던 순간들에 이 남자도 함께였다.


두 번째 도시인 그라나다에 도착한 직후, 새로운 도시로 이동하는 날, 세비야 대성당에서 콜럼버스의 묘를 둘러보던 중, 스페인 광장에서 노젓기 대결을 벌이며 깔깔거렸던 순간,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포르투에서 보고 돌아가던 골목길.


이걸 운명이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한국인이라서 내심 반가웠다. 그다음은 한번 봤던 사람이라서. 계속 마주쳐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시간 되면 밥 먹어요' 같은 대화를 나눈 뒤에도 별다른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늘 그가 생각났다. 그러곤 어김없이 마주쳤고.


한국에선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때. 아직 동양인이 거의 없던 유럽에서 같은 한국인을 여러 번 만난 게 그리도 신기했던 걸까. 우린 서로를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그렇게 밤새도록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담을 나누었다.


첫 유럽여행의 약간의 낯섦과 그리움을 반가움과 흥미로 채워준 사람, 정오.


그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남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동안, 그는 현실을 먼저 살아갈 테고 여행의 기억도 먼저 무뎌져 갈 것이다.


큰 바람이나 기대는 없다.


그저 가끔 이번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기억해 줬으면.


살면서 어쩌다 한 번쯤은 다시 운명적으로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여행지에서와는 다른 모습의 사회인으로 만나도 반갑게 안부인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교감들은 노래 같다.


평범한 순간을 낭만적으로 바뀌게 만드는 노래.


의외로 여행에서 기억나는 것들은 매우 사소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에는 사람이 있었다. 우린 이번 여행 내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난생처음 서툰 스페인어로 '당신 정말 친절해요'라는 말을 건넸던 음식점의 스페인 서버. 코로나 때는 일을 하지 못해 힘들었지만 이제 행복하다는 여행사의 가이드 한국인 그녀. 그라나다행 기차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내 볼을 쓰다듬었던 영국의 로버트 할아버지. 알함브라 궁전을 보러 가는 길에 만나 함께 춤을 추고 비눗방울을 그렸던 모로코, 알바니아, 프랑스 친구들. 한국사람에게 합기도를 배운다는 스페인 서버. 그리고 수도 없이 만난 한국인 정오.


사람을 만나면 만날 수록 꽉 닫힌 현관문 마냥 닫혀있던 마음이 풀어졌다. 잊고 있었던 밝고 해맑은 모습이 나오길 시작했다.


세상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구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저들처럼 행복해 할 수 있구나.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게 정답은 아니구나.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상황이든 간에 그저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너무나도 티끌 같았다. 그래 모든 일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데.


'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2022년 12월 1일 오전 11시.


우리도 오늘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 다음 숙소로 간다.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지붕으로 찾아오는 귀여운 얼룩이 손님과, 몇 번을 보아도 눈을 의심케 하는 창밖 풍경은 끝까지 내 발목을 잡았다.


언제가 되든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또 볼 수 있다는 위안을 스스로 한 다음에야 겨우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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