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by 환희


이하 2024.5.11일에 적다만 데이터.

드라마에 의지하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제목도 그 시점에 적어뒀던 건데, 어제도 느꼈던 바와 동일한 것인지는 기억이 안난다.

시간이 한방향으로만 흘러서 다행이야. 타임슬립이 가능했더라면,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그리고 연거퍼, 과거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모든 걸 끝내 잃을 때까지 담보잡히고 실패하러 갔겠지. 과거로 갈 수 없는 덕에, 술로 뇌를 녹이며 살아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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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 밤중 수유를할 적에는 장나라, 손호준이 나오던 <고백부부>를 열심히 봤다. 겁도 없이 새벽을 쏘다니던 21살 청춘을 그리워하면서, 나도 수능도 잘보고 일찌감치 로스쿨 시험도 봤으면 다른 여자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런 헛생각도 했다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으면'을 꽉꽉 충족시켜주는, 대학생으로 타임 슬랩하는 그 드라마에 찰싹 감정이입 했더랬다.


하기사 3년 뒤, 아기 죽기 24시간 전 새벽에도 나는 불꺼진 거실에 앉아, 박보검의 입대전 선물이라는 <청춘기록>을 보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존나 놀걸.' 씹으면서.


둘째 아이를 영안실에 넣어놓고 경찰서를 들렀다 집에 와서 누워서, 십년된 습관대로 넷플릭스를 열었을 때 들었던 당혹감 같은 게 옅게 기억난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끝없이 썸네일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절망스러우면서도,

그와중에도, 그판국에도, 아, 더이상 나는 이십대를 돌이키며 그리워하기는 어렵겠구나, 그리워할 자유를 잃었단겐가.. 환멸스런 나의 자기애.


더이상 연출된 허구 얘기를 보기는 어렵겠다 짐작했던 것과 달리, 나는 그 이후 3년간 거의 다 봤다. 모든 OTT를 구독하면서 하루종일 핸드폰 팝업창 모드로.

'정인아 미안해' 글은 누를 수 없으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드라마에는 몰입했다. 돈, 자식, 사랑, 권력, 복수심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들. 폭력적인 화면에 지치면 <인생은 아름다워>(김수현 대본)을 봤다. 거기엔, 게이 아들이 평생 얼마나 외로웠으며 외로울텐가 가슴을 뜯는 계모도 있고, 애비없이 세 아들 성인까지 길러내고 첩질 나갔다 치매 걸려 돌아온 영감을 받아드리는 어머니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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