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뜨, 체스터 여행기
영국서 지내다 한국에 돌아와서 운전을 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 운전대가 서로 반대쪽에 있기 때문이다. 잘들 알다시피 영국, 호주, 일본 등에서는 한국과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에 붙어 있어서 습관적으로 조수석쪽 문을 열고 차에 들어가게 되며 주행도 반대 방향으로 한다.
운전 도중에 앞서 가는 차가 있을 때는 그 뒤만 따라가면 크게 어려움이 없지만 앞에 차가 없으면 무심코 반대쪽 길로 몰게 된다. 내가 역주행하는 줄도 모르고 상대방이 위험천만하게 내차를 향해 달려온다고 생각하게된다. 그것도 모자라 상대 운전자에게 한마디 내뱉기까지 한다. “아니, 저놈 오늘 어떻게 된 것 아냐?”
지난 봄, 이안 페넬리Ian Fennelly가 7월 10일 영국 체스터Chester에서 워크숍을 연다는 사실을 청주USk 부회장이 알려주었다. 그동안 그렇게도 '추앙'해 오던 어반 스케치 작가 이안의 일정을 다른 이를 통하여 알게 되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이면 또 날짜가 한달 여행의 중간 부위에 해당하여 스케줄이 안맞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기 싫어 일단 등록하였다. 현지에서 일정이 안 맞으면 등록비 거금 £60도 포기할 심산이었다. 며칠이면 끝날 듯하던 런던에서의 집안일이 마무리가 되질 않고 질질 끌어 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워크숍에 참가해도 될 상황으로 변한것이다.
체스터가 맨체스터와 리버풀 사이에 끼어있는 그저 그런 자그마한 도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범상치 않았다. 맨체스처, 윈체스터 등에서 보듯이 chester란 성 castle을 뜻한다. 체스터란 단어를 그대로 이름으로 차용한 도시이니만큼 얼마나 역사가 깊겠는가. 크지 않지만 알찬 인구 12만의 잉글랜드 체셔 주 수도이기도 하다. 로마 시대부터 지어진 오래된 유적들과 튜더 왕가의 감각이 살아있는 건축물이 어우러져 영국 어떤 도시보다도 고풍스런 경관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도 셰익스피어 같은 대 문호가 이야깃거리를 쏟아 내고 엘리자베스 1세와 블러드 메리 여왕이 문화를 창달하던 시기와도 맞물려있다. 보기 드물게 강과 운하가 시내를 관통하여 수상 관광도 함께 즐길 만한 다양한 볼거리 놀거리를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가 보기드문 언덕까지 갖추고 있어 내가 가 본 중에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에 걸맞게관광객도 엄청 많았다. 거의 대부분 내국인으로 이었으나 마스크를 쓴 한 무리의 한국인 관광객을 워크숍 도중에 만나기도하였다. 리버풀이나 맨체스터에 갈 계획이 없으면 일부러라도 들러 볼 만한 곳이다.
이렇듯 관광객이 넘쳐 나는 곳인 줄 모르면서 뒤늦게 토요일 하루 숙박을 구하려 했으니 마땅하지 않았다. 일정이 늦게 나와 사정이 촉박하기도 하였다.
1박에 £300의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룬다면 토요일이라해도 시내에 호텔 방이 전혀 없지는 않다. 돈이 아까워 시내 중심가에서 대중교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근교의 숙소를 알아보았다. 마침내 버스로 이삼십분 걸리는 타빈이라는 마을의 조지 앤드 드래건 George and Dragon 호텔을 찾아 내었다. 영국식 펍으로 전형적인 여인숙 개념의 호텔이다. 1층(영국은 0층)은 술과 밥을 팔고 2층에 잠자리를 갖춘 시스템이다.
시골을 운행하는 버스 기사는 도로 주변에 대해 번연히 꿰뚫고 있으므로 목적지를 미리 말해주면 상당한 도움을 준다. 몇 년 전 호주 맥라렌 베일의 와이너리를 자전거로 돌아보기로 하고 한국에서 자전거를 1대 인터넷으로 예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살펴보니 주소 개념이 달라 내릴 곳을 정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신경이 곤두선채 좌석에 앉아 있는데 기사가 한참을 달리다가 차를 세웠다. 분명 정류장도 아닌 곳인데 버스를 멈추더니 여기서 내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자전거포 앞이었다. 버스에 오르면서 표를 끊을 때 지나가는 말로 자전거 이야기를 했더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전거 한대 빌리는 것도 예약하는 시대이다. 자전거포 주인은 이메일로 나의 키 까지 물어보아 안장 높이까지 빌리기 앞서 조절해 놓았던 것은 물론이다.
여행을 할 시 주말이 끼면 평일과 달리 조심하여야 한다. 유명 관광지라면 훨씬 덜하긴 하여도 일요일에는 교통 식사 등에 크게 제한이 따르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조금 낫다.
체스터는 런던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라 평일 같으면 새벽 열차로 워크 숍 시각인 10시까지 충분히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기차가 많지 않아 토요일에 1박을 하여야만 했다. 더구나 숙소를 주변 시골 마을로 잡은 관계로 일요일 아침 시내까지의 교통편을 미리미리 확인해야 했다. 호텔 앞 정류소에 적힌 시간표에는 ‘Sunday : No service’라 적혀있었기에 아무래도 택시를 불러야 할줄로 짐작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혹시나 일요일 버스 편에 대해 물어보니 체스터행이 가끔 있다고 한다.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재차 요청했더니 사장은 직원을 시켜 알아오게 하였다. 호텔문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직원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오전 9:28에 첫차가 있다며 휴대폰에 찍어 가져온 시간표를 보여 준다.
사장은 펍의 이층으로 방을 안내하면서 계속 싱글벙글이다. 오늘 밤은 손님이 꽉 차서 자기가 무척 기분이 좋은데 나에게 제일 끝방을 제공하게 되어 미안하단다. 출입구에서 좀 멀기는 하였어도 온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는 길가 방이어서 전망은 최고로 좋았다.
드래곤 펍말고 마을에 식당이 딱 하나가 더 있다.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면 예약이 필요하다기에 산보삼아 슬슬 걸어갔다. 다음날 교통편이 걱정되어 레스토랑 가는 김에 버스 정거장에도 들러 적혀있는 시간표를 재차 확인 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일요일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업원이 사진까지 찍어 와서 내게 보여 주었는데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시 물어보기도 뭣해서 식당 앞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확인하러 갔던 시간이 오래 걸린 것에 일단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호텔 정문앞이 아닌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정거장일수도 있겠구나 싶어 체스터 방향 쪽으로 올라 가 보기로 했다. 조금 걸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길 건너편에 정류장이 하나 보였다. 건너가 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직원의 사진대로 일요일 오전 9시 28분에 84번 버스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체스터로 통하는 길은 하나뿐이고 이 정거장은 시외로 나가는 길에있다. 호텔 직원이 엉뚱한 반대편 정거장 사진을 찍어 온 것이 분명했다. 내일 아침 틀림없이 나를 곤경에 빠뜨리게 할 그를 생각하며 속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아니, 그 친구 오늘 어떻게 된 것 아니야?'
사족.
영국에 머무른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에 나는 또 좌우를 착각하고 되레 호텔 직원의 실수라고 생각했으니... 습관의 힘은 참으로 무섭고 무서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