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영화평 - 10> 우리는 어떤 신을 섬기고 있는가?
# '폴 토마스 앤더슨'과 '폴 앤더슨'. 혹시 이 두 사람이 구별이 안 돼? 그럼 이 영화 보지 마. 지루해...
# 'PTA'는 라는 말을 보자마자 폴 토마스 앤더슨을 떠 올렸다면 이 영화 벌써 봤을 확률이 높네.
그럼 또 봐. 재밌어...
# 19세기. 초기 유전 개발, 아니 시추라는 이름의 땅 파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으면 봐도 됨.
맨땅에 헤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
# 사이비 종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창시자의 검은 속내가 혹시 궁금하면 꼭 보시길.
# 혹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반성의 시간을 가질 것.
# 저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저는 자본주의를 아주 좋아합니다.
# 뻔뻔 평점 ***** 5개. 원래 5개가 만점임.
PTA와 DDL
자본의 신전에서 희생되는 인간성?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지. 1960년대 체코 슬로바키아 공산당이 내세운 민주화, 자유화 정책의 표어였다. 그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있을까?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비 블러드>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심연을 파고드는 걸작이다.
이 영화는 현대 자본주의를 하나의 타락한 종교로 재해석한다.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통해 물신화된 자본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석유라는 '검은 황금' 곧 자본에 대한 욕망의 화신이다.
"나는 경쟁자를 죽이고 싶다"는 독백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석유 시추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다른 신을 몰아내고 새 우상을 세우는 종교적 행위가 된다.
영화 속 석유 유정은 자본의 성소(聖所)로, 그가 석유를 터뜨릴 때마다 쏟아지는 검은 기름은 마치 타락한 세례식의 피처럼 묘사된다.
이와 대조되는 '엘리 선데이(폴 다노)'의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허위와 권력욕으로 물든 또 다른 우상숭배다. 두 인물이 때로는 협력하고 투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자본과 종교가 동일한 구조적 타락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플레인뷰는 양아들 H.W. 를 사랑했을까?
그가 작업 중에 사고로 죽은 동료의 갓난아기 아들을 양자로 삼아 키운 것은 오로지 그 아이가 가진 '유용성' 때문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측은지심이라는 생래적 자비심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고 볼 만하다.
초기에는 대중에게 H.W. 를 '가족'으로 내세우는 것이 자본 확장을 위한 이미지 전략에 불과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쌓이고 어느 정도 '혈육의 정' 같은 것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H.W. 가 유정 폭발사고로 청각을 잃고 '유용성'을 상실하자, 다니엘은 그를 냉정하게 격리시킨다. 하지만 아직 관계의 파탄에 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어린 아들을 멀리 떠나보낼 때도 무척 괴롭고 힘들어했다. 사업상 급한 일이 마무리되자 아들을 곁에 두기 위해 위해 전문 교사를 붙이고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폈다. 둘 사이는 가끔 평범한 부자 사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부자 관계의 종말은 갑자기 찾아온다. 어느 날 H.W가 어른이 되어 석유 사업을 독립해서 집을 떠나겠다고 하자 부자 관계는 순수한 감정이 아닌 '거래'로 전락한다. H, W는 친 자식이 아님을 갑작스럽게 알게 된다.
다니엘이 내뱉는 "넌 내 경쟁자다"라는 대사는, 자본에 대한 집착이 부자 관계까지도 순식간에 적대화시키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플레인뷰가 엘리를 살해하며 선언하는 "I'm finished"에서 집약된다. 이는 단순한 패배의 고백이 아니라, 자본의 신을 위해 모든 인간성을 바친 자의 공허함이 느껴진다. 석유로 채운 저택의 광대한 어둠 속에서 그는 더 이상 경배할 대상도, 사랑할 가족도 없는 유령이 되어버린다. 자본주의가 약속한 '풍요'는 결국 영혼의 황무지로 끝나게 됨을 경악스러운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데어 윌비 블러드>는 '피'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자본의 축적이 수반하는 폭력과 희생을 신화적 스타일로 묘사한다. 플레인뷰의 비극은 개인의 타락이 아닌,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론적 본질을 드러내는 알레고리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신을 섬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