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nces with the Indians...> 할리우드의 선댄스
# 영화 '레버넌트(The Revenant,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는 2015년 미국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했다.
이 영화에는 디카프리오의 한이 서려있다.
아카데미 상을 타서 잘 생긴 꽃미남 배우를 넘어서고 싶은 필생의 소망! 꿈은 이루어진다!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로 영국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그리고 마침내 4전 5기 끝에 미국 아카데미상을 쟁취했다.)
# 곰에 습격받은 후 살아남은 실존 인물 '휴 글래스(Hugh Glass, 1780 ~ 1833)'의 실화가 모티프.
# 인공조명을 쓰지 않고 대부분 자연광으로 촬영했다.
이거 대단한 거다. 촬영지가 워낙 산 속이라 어쩔 수 없었던 점도 있었을 걸?
# 디카프리오의 거친 숨소리와 첼로+비올라 조합을 섞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도 굿.
# 촬영기간이 꽤나 길었다. 로케이션 촬영에만 9개월이 소요되었다. 캐나다 앨버타 주 및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상류에서 목숨을 걸고 헤엄쳐 탈출하는 씬은 미국 몬태나 주에서 촬영했다. 촬영장소 대부분이 차량 진입 불가! 적당한 일조량이 지속되는 시간이 하루에 2시간 남짓 정도라 촬영이 지체되었다. 북미에서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탓에 아르헨티나 최남단 지역까지 가서 생고생했다는데... 상 안 주면 디카프리오는 돌아버렸을지도? 아무튼 그만큼 역작이다.
# 처음 제작단계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먼저 제안이 들어왔고 박 감독은 새뮤얼 잭슨을 주연으로 하기를 원했지만 무산되었다.
#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 제작, 감독 모두 맡아한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은 극 중 주인공 '존 던바' 중위의 인디언 식 이름이다. 그의 여자 상대역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 당시 한국에서 인디언식 이름을 패러디하는 게 유행을 탔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제목의 성인 영화도 있었다니까. 기억나시려나?
# 존 배리의 음악이 참 좋다. 다시 보니 음악이 제일 좋은 듯. John Dunbar Theme는 웅장한 명곡이다.
# 러닝타임이 길어서 흥행을 기대하지 않았다는데, 입소문으로 대박이 났다. 박스 오피스 1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꾸준히 관객이 늘어났다. 제작비로 2200만 달러라는 할리우드로서는 적은 돈을 들였지만 미국에서만 1억 8400만 달러, 해외에서 2억 4000만 달러를 벌었다. 케빈 대박!!
# 뻔뻔한 영화평 레버넌트 5개, 늑대와 춤을 4.5개. 둘 다 상은 참 많이 받았다.
– 오리엔탈리즘을 벗은 인디언의 얼굴을 찾아서 –
할리우드는 늘 타인을 다뤄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서구인이 아닌 타자’를 바라보는 카메라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깃들어 있었다. (오리엔탈리즘 ; 서양이 자신을 ‘문명’으로 규정하기 위해 동양 혹은 타자를 ‘낙후하고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내는 지배적 사고방식. ‘타자’를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그들을 왜곡·단순화해 서양 중심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권력 구조)
이국적인 풍경, 순수하고 미개한 사람들, 문명인이 내려주는 연민의 시선.
19세기 영국이 동양을 그렸던 그 방식 그대로, 20세기 미국은 북미 원주민을 그렇게 그려왔다.
낯선 타자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죄책감을 세련된 감상으로 포장하는 방식 말이다. (뻔뻔하지?)
이 시선의 전형이 1990년대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이다.
케빈 코스트너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서부극의 총과 피, 정복의 신화를 걷어내고 인디언의 삶과 문화를 정면으로 담아냈다.
던바 중위가 그들과 교류하며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관객에게 ‘서부극의 인간적 복원’을 안겨줬다.
인디언을 최초로 “사람답게” 그렸다는 점에서, 영화는 분명 역사적 전환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감동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여전히 백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한다.
인디언의 언어와 삶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백인 주인공이 발견하고 번역한 세상이다.
이른바 ‘백인 구원자 서사(white savior narrative)’다.
관객은 인디언을 이해했다기보다, 인디언을 이해하는 백인을 보며 감동한다.
이 영화의 친절함이, 그래서 오히려 더 뻔뻔하다.
25년이 흐른 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의 '레버넌트(The Revenant)'가 등장했다.
눈 덮인 대지, 짐승 같은 생존, 말 대신 신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이 영화에서 인디언은 더 이상 순수하지도, 이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존의 한가운데서 싸우고, 복수하고, 욕망한다.
백인과 인디언의 경계는 흐려지고, 오히려 그 잔혹함이 닮아 있다.
이냐리투는 타자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대신 ‘생존하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 모두를 던져 넣는다.
관객이 불편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타자가 진짜 인간으로 태어난다.
진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테일러 셰리던의 '윈드 리버(Wind River)'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눈보라 속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진 여성 살해 사건.
이 영화는 인디언의 비극을 타자의 시선으로 ‘설명’ 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한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백인 남성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듣는 자로 남는다.
말해지지 않은 고통을 대신 들어주는 자, 그것이 '윈드 리버'가 보여주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다.
그리고 드디어 2023년 마틴 스콜세지의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은
이 연대의 스토리를 완전히 뒤집는다.
오세이지 부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작품에서, 인디언은 더 이상 타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내러티브의 주인이다.
스콜세지는 오랫동안 자신이 만들어 온 할리우드의 시선을 반성하듯,
백인 중심의 스릴러 구조를 포기하고 인디언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의 눈을 따라간다.
이것은 ‘타자의 목소리’가 마침내 중심으로 이동한 순간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카메라가 서서히 내려놓은 렌즈,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인간의 얼굴을 본다.
이 네 편의 영화는 30여 년에 걸친 할리우드의 자기반성 역사다.
'늑대와 춤을'이 ‘이해’를 이야기했다면,
'레버넌트'는 ‘동일한 인간 조건’을 보여주었고,
'윈드 리버'는 ‘경청’을,
'플라워 킬링 문'은 ‘책임’을 이야기한다.
이 흐름은 단순히 인디언 영화의 진화가 아니라,
서구 문명이 타자를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연대기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이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그는 진정 반동의 화신이 되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고야 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