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이 홍콩을 추억하는 법

< '열혈남아' 원제는 '旺角卡門' >

by simpo

이러면 볼라나?

# 왕가위 감독이 '예술'을 하기 전, 가장 뜨겁고 촌스럽게 사랑했던 홍콩의 뒷골목.

# 유덕화, 장만옥의 키스신은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명 장면. 안 본 사람? 이거 만이라도 봐!!

#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이다. 다음 링크에 왕가위의 명작 '중경 삼림' 리뷰.

https://brunch.co.kr/@simp6743/41

# 한자로 된 원제 '旺角卡門' 앞에 두 글자는 광둥어로 된 홍콩의 지역명이다. '몽콕'이라고 읽는다. 홍콩 여행 다녀오신 분 들은 들어 봤을 터. '卡門'은 '카르멘'의 음차다. 그러니까 '몽콕의 카르멘', 이게 원제의 뜻이다.

# 원제보다 수입 업자들이 바꿔 지은 제목이 더 나은 드문 케이스.

# 영어 제목은 뜬금없이 "As tears go by".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나 마리안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l)이 부른 명곡 'As Tears Go By'는 이 영화에 단 1초도 나오지 않는다.

# 홍콩판과 대만판이 있는데, 광둥어와 북경어 차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같지만, 결말이 다르다. 홍콩판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대만판 엔딩은 주인공이 살아남은 후일담을 더하고, 배경음악을 바꾸었다.

# 1980년대 당시 한국 개봉 이후 나온 비디오판은 대만판을 기준으로 수입했다.

# 왕가위 감독은 당연히 홍콩판 엔딩을 더 선호했다. 다행히 넷플릭스에는 홍콩판 만 있다.

# 극 중 유덕화와 장만옥의 관계가 '외사촌'간이라고 강력 추정된다.

란타우 섬에 사는 친척 아줌마가 유덕화에게 전화를 걸어 '네 집에 장만옥을 며칠 묵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누구냐고 묻자 친척 아줌마가 너의 表妹라고 한다. '表妹'는 '사촌 여동생'이라는 뜻. 유덕화가 나한테 사촌 여동생이 있냐고 물으니까 그 아줌마 대답이 '二舅父的女兒'라고 말한다. '외삼촌의 딸'이라는 의미.

(그래서 이루어지지 못했나?)


뻔뻔 평점

* * * * * 별 5개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영화라서...

영화 읽기

세련되지 않아서 더 사무치는 그 시절의 홍콩

왕가위라는 이름 앞에 으레 붙는 수식어들이 있다. 미장센의 대가, 스텝 프린팅, 고독, 그리고 스타일리시.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데뷔작 <열혈남아>는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여기엔 난해한 독백도, 세련된 절제미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땀 냄새나는 촌스러움과 무모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왕가위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가슴이 뛰는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투박한 데뷔작을 고르겠다.

1. 구제 불능의 동생, 그리고 형의 굴레

영화는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외피를 입고 있다. 빚쟁이 동생 '창파(장학우)'와 그 뒷수습을 하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형 '아화(유덕화)'. 스토리는 정말 뻔하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비열한 거리>를 홍콩 식으로 번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뻔한 스토리가 왕가위의 손을 거치면 기묘한 정서적 울림을 갖는다.

'창파'는 민폐 캐릭터의 전형이다. "나도 영웅이 되고 싶다"며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아화'는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해낸다. 관객 입장에선 "저 녀석만 버리면 유덕화가 행복해질 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아화에게 창파는 떼어낼 수 없는 혹이자, 자신이 속한 '비루한 거리의 삶' 그 자체다. 동생을 버리는 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인 양, 그는 미련하게 의리를 지킨다. 이 답답한 의리가 80년대 홍콩의 불안한 공기와 만나며 비장미를 폭발시킨다.

2. 공중전화박스, 그리고 <Take My Breath Away>

이 영화를 전설로 만든 건 폭력이 아니라 로맨스다. 아화가 '아오(장만옥)'와 나누는 전화박스 키스신은 왕가위가 앞으로 보여줄 스타일의 예고편과도 같다.

임예련이 광둥어로 번안해 부른 "Take My Breath Away(내 사랑은 그대 하나뿐)“가 흐르는 순간, 피 냄새 진동하던 영화는 순식간에 뮤직비디오가 된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몽환적인 조명, 그리고 슬로 모션.

이 장면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화는 아오가 있는 평온한 란타우 섬의 삶을 꿈꾸지만, 결국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네온사인이 깨진 몽콕의 뒷골목이다. 찰나의 달콤함 뒤에 오는 시린 씁쓸함, 이것이 왕가위가 말하는 사랑의 원형이다.


3. 덜 다듬어진 원석의 매력


<열혈남아>는 왕가위의 영화 중 가장 '왕가위답지 않은' 영화지만,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이다.

스텝 프린팅 기법 : 후반부 액션 씬에서 셔터 스피드를 극단적으로 줄여 찍어 잔상을 남기는 그 유명한 기법이 등장한다. 다만 후기작들처럼 미학적인 용도라기보다는, 폭력의 혼란스러움을 날 것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색감 : 훗날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과 완성하게 될 화려한 색감의 전조가 보인다. 차가운 푸른빛의 거리와 붉은 피의 대비는 지금 봐도 강렬하다.

4. '몽콕의 카르멘'이라는 원제 : '몽콕'이라는 지옥, '카르멘'이라는 파멸

- 몽콕은 홍콩에서도 인구 밀도가 가장 높고, 온갖 욕망과 범죄가 뒤엉킨 서민들의 거리다. <중경삼림>의 세련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나 <화양연화>의 고풍스러운 골목과는 차원이 다르다.

몽콕은 주인공 아화의 '계급적 한계'를 암시한다. 그는 란타우 섬의 평화(장만옥)를 꿈꾸지만, 그의 발은 시궁창 같은 몽콕 바닥에 본드로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숨 쉬는 공기 자체가 몽콕의 매연과 피비린내이기 때문이다.

- 카르멘(卡門): 누가 진짜 '요부(Femme Fatale)'인가?

재미있는 건 뒤에 붙은 카르멘'이다. 비제(Bizet)의 오페라 <카르멘>. 순진한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집시 여인 카르멘의 이야기다..

보통 영화에서 '카르멘'은 남자 주인공을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여주인공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 아오(장만옥)는 아화를 파멸시키기는커녕, 그를 구원하고 치유하려 하는 성녀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화(돈 호세)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 영화의 진짜 '카르멘'은 누구일까?

바로 동생, '창파(장학우)'다. 창파는 끊임없이 아화를 유혹한다. (성적인 유혹이 아니라, "형, 나 좀 도와줘"라는 피의 부름이다.) 아화는 아오와 함께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창파가 저지른 사고 때문에(카르멘의 유혹 때문에) 다시 몽콕으로 돌아온다.

왕가위는 '동생(형제애)'을 '팜므파탈'의 위치에 놓는 기가 막힌 비틀기를 보여줬다.

- 가장 비극적인 오페라

결국 '몽콕의 카르멘'이라는 제목을 풀어쓰면 이런 뜻이다.

"홍콩의 가장 누추한 거리(몽콕)에서 벌어지는, 피로 맺어진 형제들의 비극적인 오페라(카르멘)."


영어 제목인 ‘As Tears Go By(눈물이 주룩주룩)‘가 감상적인 팝송 가사 라면, 원제 Mongkok Carmen은 나름 정확한 캐릭터 분석을 품고 있다. 아화가 사랑한 건 장만옥이었지만, 그가 목숨을 바친 운명의 상대는 장학우였으니까.


5.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마지막

마지막 장면, 경찰서 앞에서의 비극적인 엔딩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창파는 기어이 사고를 치고 죽어가면서도 아화를 향해 웃는다. 아화는 그런 동생을 위해 또다시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선택이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했다.

세련된 편집이나 은유는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일은 없어, 오늘만 살아"라고 외치는 듯한 그 무모한 에너지는 이후 왕가위의 어떤 영화에서도 다시 볼 수 없다.

#卡門旺角卡門門

파멸을 향해 달리는 브로맨스의 두 얼굴

얼미전에 리뷰했던 '폭풍 속으로'https://brunch.co.kr/@simp6743/52의 두 남자와 비교해 본다.

왜? 그냥... 재미있을 거 같다. 둘 다 눈이 부시게 푸른 청춘 영화... 아니야?


<열혈남아>의 아화(유덕화) & 창파(장학우) vs <폭풍 속으로>의 유타(키아누 리브스) & 보디(패트릭 스웨이지)

1. 관계의 본질: '인생의 짐'인가, '이상향'인가

두 영화 모두 주인공(아화, 유타)이 파트너(창파, 보디)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구조다. 하지만 그 꼬임의 동력은 정반대.

<열혈남아>의 관계는 '채무'다. 아화에게 창파는 떼어내고 싶은 혹이다. 창파는 무능하고, 시끄럽고, 사고만 쳐댄다. 아화가 그를 챙기는 건 무슨 인생철학 때문이 아니라, 그저 '형'이라는 굴레와 낡은 의리 때문이다. "내가 안 챙기면 저 놈은 죽는다"는 연민, 이것이 아화의 발목을 잡는 족쇄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질구질한 '뒷골목 브로맨스'!

<폭풍 속으로>의 관계는 '동경'이다. 보디는 유타가 갖지 못한 자유 그 자체. 범죄자인 걸 알면서도 유타는 보디의 철학("100% 순수한 아드레날린")에 매료된가. 유타가 보디를 쫓는 건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처럼 되고 싶어서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건 '영적(Spiritual) 브로맨스'에 가깝다.

우리의 가슴을 찢어 놓는 건 역시 어리석기 그지없는 뒷골목 브로맨스

2. 결정적 순간: 방아쇠를 당기는 자 vs 못 당기는 자

<열혈남아> 아화는 결국 창파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미래의 행복(아오와의 사랑)을 버리고 홍콩으로 돌아와 총을 든다. 동생이 죽어가는 순간, 그 고통을 끝내주거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선택을 한다.

<폭풍 속으로> 추격전 중 유타는 보디를 쏠 완벽한 기회를 잡지만, 결국 쏘지 못하고 허공에 총을 난사하며 절규한다. 그리고 엔딩에서 보디를 체포하는 대신, 그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거대한 파도(50년 만의 폭풍) 속으로 놔준다. 상대를 죽게 두는 것이 그를 위한 유일한 길임을 인정하는 선택이다.

3. 스타일의 대결: 습기 vs 태양

왕가위의 <열혈남아> : 화면에서 비린내와 피 냄새가 난다. 흔들리는 핸드헬드와 뚝뚝 끊기는 스텝 프린팅 기법은 인물들의 '불안한 내면'을 시각화한다. 갇혀 있고, 답답하며, 탈출구가 없는 청춘의 초상이다.

비글로우의 <폭풍 속으로> : 화면이 터질 듯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서핑과 스카이다이빙 씬의 압도적인 속도감은 인물들의 '폭발하는 해방감'을 보여준다. 죽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장엄함이 있다.

<열혈남아>는 "형, 나 좀 봐줘"라며 징징대는 동생을 업고 가다 같이 넘어지는 이야기라면, <폭풍 속으로>는 "날 잡을 수 있겠어?"라며 도발하는 상대를 쫓다 같이 날아오르는 이야기다.

결국 왕가위는 '떠나지 못하는 정(情)'의 비극을 그렸고, 캐서린 비글로우는 '멈추지 못하는 욕망'의 비극을 그렸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둘 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 그리운 나의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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