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아니면 혹시 다큐?

< '런닝 맨' 그리고 '더 러닝 맨' The Running Man>

by simpo

이러면 볼라나?

# 한국 사람들에게 ‘런닝맨’은 이름표 떼기 게임 예능이지만, 이 영화 속 ‘런닝 맨’은 목숨을 거는 다큐다.

# 1987년작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아놀드 형님의 노란색 스판덱스 쫄쫄이. 당시 영화는 사실상 ‘미래판 글래디에이터 쇼’였다. 반면 이번 신작은 그 화려한 쇼 비즈니스의 껍데기를 벗기고, 킹 원작의 ‘지독하게 우울한 생존 게임’으로 돌아갔다.

# 1987년 작 '런닝 맨'은 아놀드를 위한 영화다. 원작 '스티븐 킹'의 소설은 아놀드의 액션 앞에 스러져 갔다.

스티븐 킹은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The running man'이라는 소설을 썼다. 킹은 아놀드 주연의 1987년 영화를 매우 싫어했다. 굶주린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건 평범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기를 썼는데, 영화는 근육질 영웅이 나와서 악당들을 다 때려 부수는 '프로레슬링' 영화가 되어버렸기 때문.

# 아놀드의 명대사 "I'll be back"이 1987년 작에 나온다. 런닝 맨 쇼가 시작될 때 호스트를 노려보면서 한 번 날려주신다. 누가 터미네이터 아니래?

# 영화에서 5번째 추격자로 나온 '제시 벤투라'는 은퇴 후 미네소타 주지사를 역임했다. 아놀드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거 아시겠지?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명의 주지사를 배출한 '대단한' 영화다.

# 런닝맨 쇼의 제작자이자 호스트, ‘킬리언'.

이 역을 맡은 리처드 도슨은 실제로 유명한 미국 게임쇼 호스트로 '패밀리 퓨드'를 진행했다. 영화에서도 능글능글한 호스트 역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 '스타스키와 허치'라는 미드를 아시나요? 스타스키역을 맡았던 배우가 1987년 '런닝 맨'의 감독이다. 그의 이름은 '폴 마이클 글레이저'. 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 여주인공 '앰버 멘데즈'역을 맡은 '마리아 콘치타 알론소'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다.

# 2025년작 '더 러닝 맨'이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하는 바람에 오히려 1987년 작이 컬트 오락 영화로서 가치가 높아졌다.

# 신작의 주인공 글렌 파월은 <탑건: 매버릭>의 '행맨' 이미지를 벗고, 원작 소설 속 벤 리처즈처럼 절박한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체중 감량을 감행했다. 아놀드의 '근육' 대신 파월의 '눈빛'이 영화를 채울 수 있을까?

# 표절에 관련된 이야기가 지저분하다. 미국 작가 로버트 셰클리가 1958년에 출간한 단편 소설 'The Prize of Peril'의 아이디어를 스티븐 킹이 차용했다. 문제는 소설이 아니고 영화. 프랑스 영화감독 이브 부아셋이 87년작 ‘런닝 맨‘이 셰클리의 원작을 영화화한 자기 작품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걸었고, 1996년 5월 파리 대법원에서 표절로 판결되었다. 판결 뒤,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항소 재판이 이뤄지던 중 프랑스 측 변호인이 중요한 증거물들을 가지고 탑승한 비행기가 1996년 7월 17일 추락해 버렸다.(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결국 소송은 흐지부지되고 이브 부아셋에게 배상금이 지불되진 않았다.


뻔뻔 평점

**** 4개 (젊은 아놀드의 쫄쫄이가 그리우신 그대에게는 5개다!)

영화 읽기

1987년에 2017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런닝 맨'. 2017년이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2025년에 리메이크로 돌아왔다. "공룡 미디어가 국가를 지배한다"는 설정은 요즘 같은 유튜브 시대에 다소 황당무계하게 들린다. 하지만 당시엔 CNN의 등장과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 건설이 한창이던 시대라 '언론 권력'에 대한 공포가 컸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더 나빠 보이기도 하다. 자극적인 숏폼과 개인 방송이 대중의 뇌를 지배하는 '도파민 디스토피아'시대랄까?

소설 속 벤 리처즈가 게임에 참가한 이유는 단 하나, '돈'이다. 병든 딸의 약값조차 댈 수 없는 하층민에게 미디어는 "목숨을 걸면 일확천금을 주겠다"며 서커스장으로 유혹한다. 40여 년 전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 뒤에 숨어 경고했던 '극단적 양극화'는 이제 전 세계적인 사회 불안의 핵심이 되었다.

신작은 1987년 작과 다르게 이 지점을 아주 냉철하게 파고든다. 가난한 자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 군상들을 안전한 곳에서 관람하는 모습은 소름 돋게도 현실의 단면과 겹쳐 보인다.

로마 시대부터 대중을 길들이기 위해 '빵과 서커스'가 필요했다면, <더 러닝맨> 속 미디어 제국은 '오락과 공포'를 제공한다. 시스템에 불만을 품어야 할 대중의 시선을 '범죄자 사냥'이라는 자극적인 쇼로 돌리는 수법이다. 1987년작이 이를 유쾌한 액션 영화로 풀었다면, 신작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화면이 당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디어 공룡에 대적하는 '개인 미디어'나 '해커 그룹'의 등장은 87년 영화에서도 꽤 정확하게 예측한 부분이다. 다만 지금은 그 개인 미디어조차 '조회수'라는 또 다른 거대 자본의 노예가 된 경우가 많다. 킹의 혜안이 돋보이는 건, 단순히 기술 발전을 예측해 낸 게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시스템의 모순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를 맞췄기 때문이다.

1987년 판은 과장된 근육과 원색의 폭력이 주도하는 B급 SF 액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람을 쇼로 소비하는 사회”라는 불편한 질문이 숨어 있었다. 신작은 그 질문을 다시 꺼내 들되, 웃음과 근육 대신 냉소와 구조를 앞세운다. 쇼는 더 정교해졌고, 관객은 더 무심해졌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리메이크가 아니라, 업그레이드인 셈이다.

1987년판이 “폭력적 게임쇼”라는 콘셉트를 통쾌하게 밀어붙였다면, 신작은 그 제작 시스템을 해부한다. 누가 룰을 만들고, 누가 편집하며, 누가 분노를 팔아 시청률을 높이는가? 예측은 맞은 것도, 틀린 것도 있다. 종이신문의 몰락이나 영상 플랫폼의 분화 같은 디테일은 당시 상상과 다르다. 하지만 불평등이 엔터테인먼트로 포장될 때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냉혹 해지는지에 대한 통찰은 오히려 더 정확해졌다.

캐스팅의 방향도 의미심장하다. 1987년판의 영웅은 근육질 체격으로 체제를 박살 냈다. 신작의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보통’에 가깝다. 개인의 근육만으로는 더 이상 시스템을 부술 수 없다.

당신은 참가자인가, 시청자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청자이기 때문에 참가자가 되는 건 아닌가? 1987년판이 “웃으며 즐기는 잔혹한 쇼”였다면, 신작은 “웃음이 빠진 잔혹한 일상”이다.

그 일상이 오늘날 우리들을 둘로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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