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살아남기-도망가자
한 달만에 상담에 다녀왔다. 손에 땀이 나는 걸 이야기했다. 회사 출근길부터 퇴근길까지 줄곧 손에서 땀이 났다. 핸들이 미끌어지고, 휴지가 다 젖을 정도로. 그런데 주말에는 땀이 나지 않았다. 약 부작용이 아닌가? 선생님이 '트라우마 반응'이라고 했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회사에 가는 걸 전쟁터에 간다고 인식하고 있는 거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결정은 잘 한 것이라고 했다. 매일 전쟁터에 나가서 쪼그라든 마음으로 수명을 단축할 수는 없으니까.
내 안의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내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결론은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였다. 두려움이 발동해서 세상의 모든 자극에 노출되지 않도록 포기시키는 것. 무균실에 사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지키려는 것. 자극이 오면 반자동으로 자살충동으로 이어지니까 그걸 막으려고 두려움이 항상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발동하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두려움을 이기고 다시 예전처럼 밝고 에너지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생기 있고, 의욕에 넘치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싶고, 밝은 에너지로 넘치고 싶은데, 이 회사에서는 계속 그런 시도들이 좌절되면서 그들이 뒤로 숨었고, 그게 너무 오래되어서 다시 그들을 중심부로 불러모으는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두려움과 그들을 적절하게 잘 섞어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상담방향을 잡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미련하게 버텨온 내가 참 바보같다. 나는 스스로를 재건할 수 있을까? 다시 밝고 에너지 넘치는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들어서면 회의장의 공기가 바뀌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좋은 기운을 발산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온갖 걱정들과 비난, 자극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러드는 나를 돌려놓을 수 있을까? 나도 잘 하는 것이 있을텐데, 그런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도망치기로 한 것 만으로도 첫발을 내디딘 것 아닐까? 월급이 안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지지만, 다 살길이 생긴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말처럼 어떻게든 살아나가게 될까? 살기 위해서 뛰쳐나갔는데 다시 또 삶이 막막해질까봐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지? 불안을 잠재우는 약을 줄였는데, 마지막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불안감으로 필요시 약을 먹었는데도 가슴이 계속 두근거린다. 이렇게 모든 것에 약해져있는 내가 너무 안 됐다.
어쩜 이렇게 나 자신을 방치한 걸까? 왜 나를 제일 먼저 챙기지 않은 걸까?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은 걸까?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약 남이었다면 이렇게 되도록 나뒀을까? 회사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진다. 5월 말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빨리 도망가고 싶어지는 걸 참고 버티느라 죽을 것 같다. 이런 나로 몇 년을 살아온 거다. 그 긴 세월을.
지나간 기회들을 생각하며 그 때 이랬을 걸, 저 때 저랬을 걸 떠오르는 후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매진하면서 나를 다시 돌봐야겠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늦었으면 어쩌고 아니면 어쩔 건가. 이미 벌어진 일인 걸.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다시 인생의 활기를 찾으려고 해야지, 인생의 좋은 면만 보고 살아야지 싶다.
도망가는 건 잘못이 아니다. 살기위해서 도망쳐야할 때를 알고 도망치는 건 현명한 일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현명한 일이다. 자신감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