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아직 환자야
한 달만에 찾은 병원. 컨디션 일기는 계속 20~25점대로 그닥 높지는 않지만 평이하게 안정적인 점수를 기록하고 있고, 수면제도 한 알을 줄였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안 먹기로 한 수면제가 의존성이 더 높은 약이니 잘 되었다며, 또 약을 줄였다고 축하해주셨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은 지금처럼 약간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좋고, 직장동료 복은 없어도 남편 복은 있다며, 인생에서 하나의 복을 선택한다면 남편 복이지 않겠냐며 잘 지내고 있다고 격려해주셨다.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열흘동안 엄마, 아빠의 식사를 챙기며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 열흘 동안 체력을 또 다 써버렸는지 어제는 방전이 되었다.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까지 기운이 없고, 체한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급기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오랜만에 필요시 약을 먹었다. 약을 먹고 3-40분 누워있으니 컨디션이 좀 돌아왔다.
실은 어제 한 기관의 센터장 자리 오퍼가 들어왔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연말에 새로 오픈하는 공간의 센터장 자리가 날 건데, 나 같은 문화기획자가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자리가 어제 공고가 났다면서 연락이 왔다. 고민이 됐다. 예술교육 기획 일이긴 하지만 분야가 약간 다르고, 대상 특수성이 있는 기관인데, 공간과 예산의 스케일이 문화재단보다는 적은 곳. 새로운 일을 하게 될 기회이기도 하고, 나를 찾아주니 고마운 일이지만, 일단 매일 출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른 건 둘째치고 매일 메여서 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남편과 산책하며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은 내가 건강하게 생활하는데 회사에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밤도 새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일정치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다면 하고 걱정이 되거나 겁이 난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서 소화제를 먹고, 쉬고 있는데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급기야 필요시 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공황이 온 거다. 숨이 돌아오고 머리가 이틀만에 맑아졌다. 엄마 집으로 다시 데려다주면서 남편이 말했다.
"자기 혹시 오퍼 받은 거 때문에 걱정되서 그런거야? 만약 그런 거면 안 가는게 맞는 것 같아. 취직이 된 것도 아니고 오퍼 받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면,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지."
"정말 그런 걸까? 그건 너무 일반적이지 않잖아. 그저 오퍼를 받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그럴 수 있지. 너도 그럴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어. 이게 현실이야."
그래. 이게 현실일 수 있다. 나는 어쨌든 아직 환자다. 엄청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좋아지는 중인 상태. 언제 과거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상태. 어디서 자극 받아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상태. 이게 현실이다. 남편은 내가 힘들어지면 자기도 힘들어진다면서, 나에게 가장 편안한 선택, 건강한 선택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일하고 싶은 걸까?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기획 일은 재미있다. 새로운 대상에 대해서 탐구하고 공부하고, 그 사람들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짜고, 전문가를 섭외하고, 새로운 일을 꾸미는 일은 항상 재미있다. 하지만 그 일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그런 걸 견딜 수 있을만큼 건강해졌을까? 부딪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일 안하고 그냥 편하게 지내고 싶다. 하지만 2월에 프로젝트 끝나고 정말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 때는 또 심심해서 힘들어할거다. 그러니 일을 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낯선 분야에서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도모할 만큼 내가 건강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남편은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내 마음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세상에서 내 마음 알기가 제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