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아침에 30분씩 글쓰기를 한다. 일종의 일기다. 컨디션 일기를 쓰고 있지만, 손으로 쓰는 일기는 좀 더 마음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명상은 건너뛰어도 글쓰기는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글쓰는 게 좋다. 오늘은 애 쓰지 않고 살고 싶다고 적었다.
서른. 맨날 코 밑이 헐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던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찾아간 친구가 말했다. "애 쓰지 말아요. 애 쓰지 않고 살아도 괜찮아요."
그 후로도 나는 무척 애 쓰며 살아왔다. 어떻게 해야 애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건지 몰랐던 것 같다. 모든 것에 열심이어야 하고, 모든 것에서 나를 증명하여 인정받고, 모든 것에서 잘 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었기에 늘 애 쓰며 살아왔다. 타고난 저질 체력과 게으름을 이기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살아왔다. 결국 병이 났다. 늘 그랬다. 죽기 직전까지 가야 내가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만 둘 수 있었다. 그 역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기에 이번에는 정말 죽기 직전에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해볼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본 다음에야 그만둘 수 있는 병.
마무리해야 하는 일과 새로 오퍼 들어온 일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를 발견한다. 그저 그냥 가만히 있고 싶은 나. 무기력하고는 좀 다른 상태인데, 이제 좀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최근에 숨이 안 쉬어지고 심장이 뛰고 몸에 기운이 빠지는 일이 잦아서 오늘은 아침약과 함께 미리 필요시 약을 먹었다. 늘 가슴 졸이며 살다보니 조금만 자극이 와도 심장이 알아서 쪼그라드는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도 않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만 해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내 기억에는 8월 즈음. 꽤 오랫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 없이 살아왔다. 그러니까 살만했다. 교리 교육을 들으면서도 자살을 터부시하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큰 성과다. 살만하다. 삶에 대한 집착과 애착은 없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자는 태도가 된 것 같다.
항상 발전해야 하고, 항상 잘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현재에 정체되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되면 어떤가. 어쨌든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흘러가고 있는데. 숨만 쉬고 살아도 이미 나는 지나간 시간의 내가 아닌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냥 주어진 순간을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 나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좀 바보같으면 어떤가. 그냥 내가 바보라는 걸 인정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애 쓰지 않고 너무 노력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그저 살아가고 싶다.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쓸 에너지도 없고, 물에 몸을 띄워놓고 그저 누워있을 힘 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고 싶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자기계발서와 자기계발 영상이 공부하고 돈을 벌고 성실하게 노력하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 또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그냥 살고 싶다. 그냥 주어진 것 안에서 나를 닦달하지 않고 살고 싶다. 좀 게으를수도, 좀 멍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의 그릇이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더 이상 애 쓰고 싶지 않다. 그럴 에너지도 없다.
이번에 엄마, 아빠 밥을 해주면서도 나는 그것마저도 '잘' 하고 싶었다. 뭘 먹지 않는 엄마를 어떻게든 먹게 하고 싶었고, 엄마를 아프지 않게, 엄마가 조금이라도 활력과 기억을 찾게 하고 싶었다. 열흘 만에 병이 났다. 에너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온통 엄마의 밥과 약, 일기에만 집중했다. 엄마와 아빠는 좋아했지만, 나는 병이 났다. 남편은 걱정했다. 내가 아프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에너지를 쓰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몰랐다. 그의 걱정이 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편이 맞았다.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일은 '애 쓰지 않는 것' 이었다. 애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몰아붙였던 삶만 있었다. 애 쓰지 않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애 쓰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생각만 하면서 습관처럼 내달렸던 것 같다. 이제 좀 놓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