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내려놓기
요즘 수면제를 먹지 않고 눕는데,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다시 수면제를 먹어야 하는지 고민이다. 매일 새벽 4시쯤 잠이 든다. 그러면 오전이 날아간다. 핸드폰을 보지 말아야 하는데, 잠이 안 오니 핸드폰을 보게 된다. 탄핵이 가결될 때까지는 계속 뉴스를 봤다.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인정을 하자. 그래서 일거리가 끊긴다면 다른 일이 생기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평생을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근면성과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 성취야망과 완벽주의는 높은 사람. 성취야망과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나를 좀 편안하게 놔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남편에게 내가 일자리를 못 구하더라도, 돈을 못 벌어와도 사랑할거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며, 자기가 일을 못하고 있을 때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엄청 사랑했지." 남편은 명상의 효과인 거 아니냐고 했다. 요즘 가끔 명상을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니 대신에 2주 간 일요일에 성당 카페 봉사를 했다. 몸도 움직이고 사람들과 만나니 활력도 올라가고 기분도 좋았다. 그런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이번 연구는 1월과 2월에 끝난다. 이번 연구가 끝나면 어차피 봄에는 일거리가 없을 것이다. 다른 연구에 또 투입될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거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에 식구들과 하루, 친구들과 하루 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집에 사람을 초대하고, 음식과 식기류를 찾아보는 것이 즐겁다. 집안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 집을 정리하면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재미있다. 사람들이 이걸 좋아할까, 저걸 좋아할까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고. 돈은 좀 들지만. 나는 좋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친구들 불러서 밥 먹고, 식구들이랑 밥 먹고 싶어서 식탁도 큰 거 샀는데 많이 못 쓴거 같다. 이렇게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몇 년만이다. 좋은 현상이다.
일에 대해서 마음을 내려놓으니 쉴 때도 마음이 편하고, 일할 때도 마음이 편하다. 일의 성과를 애쓰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생긴다. 일을 잘 하고 싶은 열망은 인정받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나를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 속에는 나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일을 잘 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고, 일이 아니라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그만두기까지의 여정은 이제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이후만 생각이 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좀 더 편안해 지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한번에 착륙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착륙하고 있다. 종이 비행기처럼.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성체조배도 하고 싶다. 신앙 생활에 조금씩, 천천히 스며들고 있다. 오늘부터는 다시 수면제를 먹어봐야겠다. 일도 잘 마무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