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자의 삶] 그래야 계속 일할 수 있다
작년에 시작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2월에 마감했어야 하는데, 3월 마감으로 미뤄졌다. 예상보다 사업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고, 성과지표를 제대로 만들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3월에는 무조건 마감을 해야하는 일이라서 일이 되든 안 되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다. 어렵고, 재미도 없어서 너무 하기 싫은 마음에 앉아는 있는데, 계속 딴짓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인 거다. 일을 하고, 쉬고 노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하는데 패턴으로 봤을 때 쉬고 노는 시간은 최소 2배는 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다시 일을 시작할 마음이 생긴다.
왜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것인가? 돌아봤다. 작년에 했던 몇 가지 다른 프로젝트들과 올해 새로 시작하려는 일을 포함해서 돌아봤다. 아직 마감하지 못한 일을 포함해서 두 개 프로젝트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 아니였다. 제안이 들어왔고, 새로 계약된 일이 아직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일 것 같아서 수락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아니였다. 다른 네 개의 프로젝트는 일이 상대적으로 쉽기도 했지만, 내가 재미있어할 만한 포인트가 있었다. 기획을 하거나,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거나, 새로운 영역의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배워보거나, 기획 워크숍 멘토링을 하는 등의 일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프로젝트는 성과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지표를 만드는 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상의 영역이 작동할 여지가 거의 없는 프로젝트였다.
자료를 만들면서 보니까, 나는 개념을 정리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썰을 푸는 건 재미있어 하는데, 딱 맞아 떨어지는 데이터 매칭 같은 거에서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정성적인 글 쓰기와 활동은 재미를 느끼는데, 정량적인 활동에서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까 일의 진행도 안 되고, 성과도 안 난다. 중간 과정에서 내가 이런 일과 맞지 않다는 걸 느끼고 좌절도 많이 했다. 발주한 사람도 다시 일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나도 이런 일은 신중하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종류의 일이라도 새로운 개념을 그리고, 일종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일들이라면 재미있게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수주하지 말아야겠다. 나도 괴롭고, 발주자도 괴롭다.
일의 초기부터 내가 엄청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니까 남편은 중단하라고 했었다. 나와는 맞지 않는 일인 것 같다고, 괜히 스트레스 받아서 다시 예전처럼 아플까봐 엄청 걱정했다. 게다가 일 한다고 밤을 새우기까지 하니까 남편은 이십대도 아닌데 그렇게 몸을 쓰면 안 된다며 일을 중단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프리랜서로 일할 영역이 하나 줄어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며 강행하고 있다. 뭐든 직접 경험해보고 나서야 깨닫는 미련한 나는 이번에도 남편 말이 맞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신중하게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일을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재미있는 일을 많이 기획하고 도전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는 걸 잠시 잊었다. 무슨 일이든 안 해본 일을 하면 다 될 줄 알았다. 연구 프로젝트도 거진 10년 만에 하는 거라 새로운 영역의 일이니 쉽게 받아들였다. 그게 아니였다. 연구 프로젝트를 주로 하던 기간도 있었는데, 그 때도 꽤나 괴롭게 일을 했었다. 그 때도 주로 성과평가나 지표 만드는 일을 많이 했고, 정책사업 중장기 계획 연구도 했었는데, 그나마 상상력이 발휘되는 중장기 계획 연구가 재미있었던 것 같다. 연구 프로젝트의 재미는 사실 만들어낸 모델에 내용들이 딱딱 맞아떨어졌을 때 느낄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내게는 참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연구 프로젝트를 하다가 조직에 들어가서 사업 기획과 운영을 하는 것이 그렇게 자유롭고 좋았다.
다시 시작하는 연구에서도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미보다는 어려움에 맞딱드리면서 새로운 경험치를 획득했다. 연구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그 내용에 따라서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나 때문에 힘들거라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실망할 거라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롭다. 나를 잘 알고 일을 받아야 나도, 발주하는 사람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으니, 이제는 함부로 일을 맡지 말아야겠다.
문화행정 일을 하면서 만난 팀장님과 동료 중 일부는 '순서도'를 기반으로 일처리 하는 사람이었고, 나를 포함한 또 다른 일부는 '벤다이어그램'을 기반으로 일처리 하는는 사람이었다. '순서도'를 기반으로 일처리 하는 사람은 단계를 설정하고, Yes or No의 결과에 따라 대안을 마련하고, 절차적 Input과 Output이 확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요즘 말로는 일에서만큼은 대문자 T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나처럼 '벤다이어그램'으로 일하는 사람은 주제에 대한 그룹핑과 연결된 허브들을 찾고, 스노우볼링을 통한 해결점을 만들어가는 편이다. 마인드맵 형식의 문제풀이를 선호한다. 좀 더 정성적인 접근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제 정의가 같더라도, 어떤 접근법을 택하느냐의 문제라서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는데, 공식적인 회의 문서를 빠르게 작성하는데는 '순서도' 방식이 적합할 수 있고, 사안이 복잡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문화기획에서 프로그램을 런칭하는 사전 기획 단계에서는 '벤다이어그램' 방식이 적합할 수 있다. 실전에서는 두 유형이 일의 단계마다 적절히 혼용될 수 밖에 없다. 일의 경험이 쌓일수록 '순서도'형은 '벤다이어그램' 사고방식을, '벤다이어그램'형은 '순서도' 사고방식을 후천적으로 습득하고 둘 다 활용하게 된다. 다만, 자신이 더 좋아하는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성격의 일을 찾아가면 된다. 문화기획과 행정에서도 '순서도' 사고방식이 더 많이 필요한 일도 많다.
이런 나의 성향을 파악한 건 꽤 오래 전인데, 항상 여기에 맞는 일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거다. 다만 이런 나의 성향을 종종 잊고 지냈는데, 이제는 잊지 말아야겠다. 일을 오래하려면 내가 힘들어도 재밌는 일을 해야하니까. 큰 깨달음을 준 지난 5개월이었다. 빨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 일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