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수장시켰던 감정의 봉인이 해제되고 있다
날씨를 예측하기 어렵게 미친듯이 화창한 5월이었다가, 스콜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이었다가를 반복하다 어제부터는 습도가 올라가고 햇살이 여름이 되었다. 오늘 오전에는 한 여름처럼 습기 그득한 땀에 젖었다. 날씨가 오락가락 할 때마다 내 기분도 오락가락했다. 다만, 예전과 다르게 눈부시게 화창한 날에는 날아오를 듯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웠고, 날이 흐리거나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날이 화창하면, '기분나쁘게 날씨는 좋네!'라고 생각했고, 날이 흐리면 '검푸른 동굴처럼 암흑같은 날씨구나' 했다. 좋은 걸 좋게, 더 좋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힘든 걸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는 재채기처럼 넘길 줄 알게 되었다. 약간의 그림자가 있어도 너무나도 희고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고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병원가기 전에 이틀 정도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건너뛰고, 수면제도 건너뛰게 되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없이도 잘 지냈고, 수면제는 먹고 안 먹고와 상관없이 혹은 먹어도 약의 효능과는 거의 상관없이 엄청 잤다가, 엄청 못 잤다가 해서 약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약을 하나 더 줄일 수 있을지도 상담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항우울제와 새로운 수면제 한 알을 먹기로 했고, 항불안제는 필요시 약으로 먹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항우울제보다는 항불안제를 줄이자고 했고, 수면제는 의존성이 없는 약 중에서 최근 심해진 잠꼬대와 생생한 꿈을 줄이는데 집중된 약으로 바꿔보자고 했다. 퇴사 1년 만에, 하루 복용 10알 내외의 투약에서 하루 복용 2알로 줄이게 되었다.
퇴사 후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면서 각종 필요시 약과 다수의 수면제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와 기타 등등에서 빠른 속도로 약을 하나, 둘씩 줄여나갔다.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항우울제 1알을 디폴트로 하고, 수면제 2알을 1.5알로, 다시 1알로 줄였고, 항불안제를 필요시 약으로 돌리면서 병의 호전을 체감하게 되었다. 다만, 연초에 재취업 기회 수용 여부로 다시 불안이 올라오고 공황이 잦아지면서 항불안제를 다시 정기복용했고, 총 3알을 먹고 있었다.
3알로 돌아가기 직전의 2알로 줄어드는 속도가, 상태가 호전되는 속도가 의사와 상담 쌤도 놀랍고 기쁘고, 나도 좋으면서도 어리둥절하고 어쩌면 멀미가 나야하는 건가? 싶은 기분이었는데, 한번 계단을 겪고나서 2알로 다시 돌아온 지금은 그 때보다 편안하다. 나의 호전을 몸과 마음으로, 보다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6개월에 한번 씩 우울감과 불안을 검사하는데, 이번이 퇴사 후 두 번째 6개월 이었다. 첫 6개월 째에도 퇴사 영향으로 급격히 좋아진 후였는데, 다행히 이번에도 적긴 하지만 2~3점씩 낮아졌다고 했다. 약간의 우울감과 불안 정도로 볼 수 있다고. 우울감보다는 불안이 조금 더 높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장기간의 깊은 우울을 지나, 조울증까지 진행되고, 다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몸과 마음이, 내 존재와 영혼이 으스러질 것 같아서 선택한 퇴사는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 수 년을 고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날들이 무색하게, 퇴사와 함께 모든 힘든 것이 댐 무너지듯이 쏟아져나와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내가 수장시켰던 것들이 드러났다. 차라리 어느 것도 느끼지 말자며, 꽁꽁 숨겨놓아던,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과 함께 봉인되었던 행복과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다 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겹겹으로 봉인하고 수장시켰던 다양한 나의 감정들이 제 모습 그대로, 아니 더 숙성되어서 찬란하게 돌아오는 것 같다.
그 15년여의 봉인이 단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며.
최근에는 정말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올리브유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간단하고 가벼운 채소와 과일, 생선 등으로 식사를 하고, 간식을 줄이고, 몸을 들여다보며 짧고 가벼운 슬로우 조깅과 스트레칭도 하고 있다. 좋다는 건 다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기복도 없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다.
오래된 우울증과 한번 발병했던 조울증이 평생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는 이제 좋은 날만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과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숙성된 맛과 향으로 돌아온 나의 찬란하고 빛나는, 투명부터 암흑까지의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안으며, 이번에는 나도 좀 더 성숙한 태도로 인생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몸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구름이 갠 후 화창한 일요일의 둥둥 떠오르던 감정이 화요일 오후부터 뜻없이 살짝 내려와도 '아.. 놓쳐버린 풍선처럼 너무 빨리, 많이 올라갔었나보다' 하면서.
지난 8월 이후 처음으로 컨디션 점수가 40점을 기록했다. 9개월 만이다. 8월 초 40점에서 시작해 중순을 넘어 10점대로 떨어졌다가 9개월에 걸쳐서 조금씩 등락을 반복하며 다시 40점을 찍었다. 요 며칠 약간 떨어졌긴 했지만, 예전처럼 등락폭이 크지 않다. 이렇게 조금씩,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다.
감사하다. 모든 것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