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와 우울기를 회상하며

인류학자와 미술심리치료사가 말하기를

by 강마

요증 줌으로 인류학 책모임을 한다.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인데 인간 너머의 인류학에 대한 이야기다. 박사님들과 같이 세미나를 하다보니 많이 배운다. 책을 읽는 방법부터 공부하는 법, 생각하는 법까지. 그리고 어제는 제주도에 계신 미술심리치료사의 목표를 이루는 습관만들기 - 칸칸그림일기 라는 워크숍을 들었다. "숲은 생각한다"의 독후감이나 "칸칸그림일기"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쓰기로 하고, 두 가지에서 툭 튀어나온 공황증상과 우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공황 - 내 주변뿐만 아니라 나 자신, 나의 신체와 사고로부터 소외되는 감각

"숲은 생각한다'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연구를 위해서 아마존 유역의 에콰도르 아빌라 마을에서 루나족과 함께한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험난한 지역을 통과하는데 앞뒤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산이 더 무너져내릴수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콘의 공포심과 달리 주변 사람들, 심지어 관광객들조차 걱정하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콘은 " ... 처음에는 불안하기만 했던 감각이 곧 깊은 소외감으로 변질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 간의 세계 인식의 불일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떼어놓았다. 뒤쳐진 나와 함께 있는 것은 미래의 위험에 대한 걱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맴돌았던 나 자신의 사고뿐이었다. ... 나의 사고가 주변 사람들과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나를위해 존재한다고 항상 믿어 왔던 것, 즉 나 자신의 신체와의 유대감마져 의심하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집이 없는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확신하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신체적 유대감을 믿어야 할까? 왜 내가 "나의" 신체에 대한 "나"의 유대감을 믿어야 할까? 그리고 만약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란 무엇일까? 나는 살아있기나 할까? 이런 생각들로 나의 사고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근본적인 의심의 느낌, 즉 내가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나 자신의 신체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이 느낌은 몇 시간이 지난 후 산사태가 멈추고 우리가 그곳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기술한다. 이후 공황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일단 이 공황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것, 심지어 나의 신체와도 분리되어 극단적인 소외로 빠져드는 이 감각이 '공황'이라는 묘사가 매우 탁월하다. 그러니까 극도의 공황상태에서는 거의 유체이탈과 같은 경험을 한다. 숨도 못 쉬고 물 밖의 물고기처럼 헐떡거리고 있는 나 자신,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을 느끼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런 나를 밖에서 지켜보는 '나'가 하나 더 있다. 약한 강도의 공황증에서는 그 밖에 있는 '나'가 "곧 지나가. 안 죽어. 다른 생각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도의 공황상태에서는 두개의 나가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얼음 땡 놀이에서 두명 밖에 없는데 둘다 '얼음'을 외친 것처럼. 이 부분을 읽으며 '공황상태에서 이렇게까지 사고가 작동한다고?' 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 그렇지, 이 분리된 감각. 맞붙어 있는 생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소외 감각, 그래서 더 불안이 고조되는 감각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다시 오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다시 겪는다해도 똑같이 10,000미터가 넘는 심해에 빠져든 것 같은 어둠과 압박감, 차가운 공기를 피할 수는 없겠지.


뜻하지 않게 인류학 책에서 이런 경험을 곱씹게 되다니, 신선했닸까..


우울증 - 우울의 습관, 우울의 예측가능성, 우울로의 방향타

정은혜 미술치료사의 '칸칸지니' 그림일기 워크숍에서도 급작스럽게 '우울증'에 대한 경험을 떠올렸다. 워크숍의 주요내용은 "감정은 목표달성과 그를 위한 습관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감정은 힘이 쎄다. 감정은 파도처럼 출렁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너무 하찮아서 안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목표를 설정'하자. 실망을 습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조건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가장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액션을 통해 '과정'을 만들어가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했을 때, 안 했을 때, 하고 싶었을 때, 안 하고 싶었을 때의 감정을 간단한 색 또는 그림으로 그려서 한달동안의 자신의 감정을 읽어주자"는 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의 뇌는 '예측가능성'을 좋아한다. 우리가 익숙한 것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습관과 패턴을 만들려는 시도는 불편하다. 오랫동안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행복을 예측하지 못한다."


한창 우울의 심연에서 헤메고 있을 때, 상담사는 끊임없이 내게 루틴을 만들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냥 하는 것'을 하나씩 늘려가라고 한다. 감정이 좋든, 감정이 바닥이든 '그냥 하는 것'이 늘어나야 한다고. 예를 들면 조증시기에 했던 달리기는 울증이 오자마자 증발했는데, 책모임과 성경공부, 훌라, 묵주기도 같은 것은 '그냥 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일들을 일상에서 사소하게 하나씩 더 쌓아올리라고. 그러니까 이 말은 도루마무처럼 돌아가는 우울의 해저 바닥에서도 할 수 있는 일, '그냥 하는 일'을 만들라는 거였다.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만들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증삽화로 인한 급속도의 관심과 열정이 아니라, 뭔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들이 생기고, 날씨가 좋은 날 햇빛드는 모습이 보이고, 불안함에서 안정으로 찾아오는 주기가 조금씩 빨라지는 건, 내가 우울의 습관에서, 내 뇌가 "나는 우울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이라고 예측하는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뜻일지도.


우울하고 자살하려는 멍에를 평생 지고 살거라고 생각했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점점 자이언트 트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아주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옛날 호호 아줌마나 이상한 나라의 폴이 했던 것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십자가는 나의 우울과 자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십자가를 뒤에서 살짝 들어주셨다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 아주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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