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자의 삶] 지금 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치세요!!
당신이 나를 찾아온 첫날, 내가 말했죠. "지금 당장 도망가세요!!"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고 이 글을 보고있는 건가요? 아직도 문화기획자가 되고 싶으신 거에요? 제가 말했잖아요. 좋은 그림, 좋은 공연을 고르는 충분한 재원을 가진, 좋은 눈을 가진 소비자가 되는 것이 문화예술계를 더 풍요롭게 할 거라고. 그리고 당신의 삶도 구할 거라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냐고요? 물론이죠!! 나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나는 제 때 제대로 도망치지 못해서 여기 있지만, 당신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구요. 그렇게 당신의 삶을 구하고 싶었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고 있죠.
생각해보세요. 저는 마흔 중반이에요. 비슷한 학력을 가지고 비슷한 사회생활 경력을 가진 친구들의 연봉이 1억이 넘은지 5년도 더 지났어요.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기관장이 되어도 연봉 1억은 언감생심이에요. 물가는 계속 오르고 삶은 점점 팍팍해지는데, 당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언제까지 여기서 이 일을 하면서 행복이 무료함이나 괴로움보다 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사람사는 건 다 똑같아요. 사회생활 몇 년 하다보면 연봉이 나의 자존감인 것 같아서 무너질 때가 있어요. 회전문 관객이 되고 싶어도 살림이 팍팍해서 될 수 없을 때도 있어요. 회전문 관객이라뇨. 결혼이라도 한다면 그림에 떡이 되기 십상이죠. 좋은 그림을 사고 싶다구요? 당신이 좋은 작가를 발견하고 그 작가의 전시회를 열어줄 수는 있지만, 그 작가의 그림을 사려면 당신은 당신의 월급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고, 작가에게 카드 할부도 되냐고 물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좋아하는 공연을 마음껏 보고, 그림도 마음껏 볼 수 있지 않냐구요? 일이잖아요. 당신은 공연에 감동하기 전에, 혹은 공연에 감동한 후에라도 이 공연은 이 공연장에서 했으면 더 좋았을 걸, 음향이 어떻고, 조명이 저떻고, 서비스 질은 어떻고, 이런 공연이라면 이런 홍보를 했더라면 하고 투덜이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감동을 오랫동안 가져갈 공연을 점점 찾기 힘들어질거에요. 그리고 당신의 공연장, 전시장에서 하는 공연과 전시라면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겠죠. 역시 우리 공연장은, 전시장은, 우리의 기획은 이래서 안 되는구나.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심지어 교통도 나쁘잖아? 등등 하면서요. 당신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없을 거에요. 결정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공간에서 하는 작품들을 감상할 시간이 없어요. 백스테이지 관리며, 홀 관리, 관객 관리, 스태프 관리, 전시장 관리, 관리, 관리, 관리를 위한 관리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일들을 해치워야 하니까요.
당신은 점점 공연도 안 보고 전시도 안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개인의 절대적인 경제력과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높은 의지가 있지 않는 한,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장인'이 그렇게 한다는 건 다른 많은 것들, 이를테면 가족과의 시간, 다른 사람을 사귈 기회, 다른 세상을 만날 기회를 놓친다는 뜻이니까요.
그럼에도 이 일이 여전히 좋고, 그래서 덕업일치를 이루겠다는 굳은 결심이라면 좋아요. 하지만 다시한번 말하지만,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세요. 한 살이라도 어려서 다른 경험으로 문화기획을 조미료처럼 쓸 수 있는 곳으로요. 그리고 진정한 덕업일치를 위해서라면 당신은 당신의 처우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시작하셔야 해요. 아시겠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으니까요.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가져야해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구요.
알아요.
그럼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여기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한번뿐인 인생을 걸어보고 싶죠?
공연만, 전시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다른 문화정책사업이며 문화예술교육이며 이 쪽도 얼마나 많은 분야가 있고, 여기서 하는 행정도 있고 홍보도 있고 인사도 있고 다 있는데, 연구조사도 있고, 내가 할 일이 그것뿐이겠어?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죠? 그럼 남아야지 어떡해요...
그렇게 발을 들인지 20년 즈음 되어갑니다. 중간에 도망도 갔었는데 결국 돌아오게 되더라구요. 당신이 각오가 되어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일이 당신에게 중요한지 스스로 백번 물어서도 다시 여기에 와 있다면 환영합니다. 우리 잘 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