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없이 쉬세요

[우울증 환자 생존기] 충분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by 강마

3주만에 정신과에 다녀왔다. 그 동안 갑자기 울고 소리지르고 가슴을 치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기분이 막 좋지도 않고, 막 가라앉지도 않고 평이했다. 컨디션 점수가 40, 50점 대까지 올라가지 않고 20점대에서 머물렀지만 기복은 많지 않았다. 프로젝트 있는 날만 빼고 병가를 계속 쓰고 있어서 외부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서일 수 있다. 어제는 상담도 미루게 되고 예정되어 있던 일정에서 일도 틀어지면서 감정의 동요를 크게 느꼈다. 남편이 관찰일기에서 아직 외부 영향을 크게 받는 것 같다고 기록했었는데 맞았다.


정신과에서 몇 개월간의 휴식을 아주 오랫동안 강력하게 권유했었다. 그래서 이번에 내 병가 소식에 선생님이 좋아하셨다. 푹 쉬라고. 푹 쉬어도 된다고. 지금까지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증상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힘들 때 쉬지 않으면 언제 쉬겠냐고.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쉬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불안감이 든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너무 달려오기만 해서 쉴 줄을 몰라서 그렇다며, 쉬고 멍 때리고 즐거운 일을 하는데 익숙해지라고 했다.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인정하고 쉼을 주라고 했다. 번아웃이 심하게 온 것이니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도 내려놓고, 그냥 하루 하루 편안하게 쉬는데 집중하라고. 울컥했다.


숲 산책을 권했다. 정신과 이름 중에는 'ㅇㅇ숲'이 들어간 병원이 많다며, 숲 치료는 정신과에서 효과가 검증된 것이라고 했다. 쉬는 동안 신랑과 일정을 맞춰서 숲 걷는 걸 해보라고. 짧게라도 여행을 다니며 숲길을 걷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숲길에서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며. 알겠다고 했고, 진료 후 신랑에게 말해서 일정을 맞춰보기로 했다.




나 열심히 살았나? 열심히 산 거 같다. 매일같이 일 하고,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 가운데서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늘 애썼던 것 같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조카가 이번에 수능시험을 봤다. 우리 귀염뽀짝이 수능을 본다니까 울컥 하더라. 우리 쪼꼬맹이가 어느새 커서 수능을 본다니, 얼마나 마음 졸이는 시기를 겪고 있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오리 귀염뽀짝이가 후회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가지고 건강하게 시험 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다행히 시험을 마친 녀석의 얼굴이 홀가분해보였고, 지난 1년동안 힘들게 열심히 했다고 했다. 대견하고 기특했다. 시험 치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서 얼굴 부비고 손을 부비면서 건강하게 잘 돌아왔다고 신고했다는 녀석이 고마왔다. 언니들과 하는 카톡방에서 각자 시험 전에 어떤 응원을 보냈고, 뽀짝이가 시험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어땠는가에 대해 나누다가 큰 언니가 말했다. "녀석은 이렇게 고모들이 자기를 사랑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몰라줘도 상관은 없지만. ㅎㅎ"


그렇다. 나도 이런식으로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겠지. 몰라줘도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대견하다고 사랑받고 있는 거겠지. 건강하면 된다는 신랑처럼, 다른 가족들도 무엇보다 내 몸 건강, 마음 건강을 빌며 사랑하고 있는 거겠지. 내가 그런 것처럼.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사랑받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자해나 자살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지. 이렇게 놀고 먹어도 괜찮다고 사람들이 말해주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약간 어색하지만 이 상황이 낯설어서 재밌기도 하다.




의사 선생님이 왜 그렇게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마음을 잘 들여다 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주변과 너무 비교하며 산 건 아닌지, 내가 나태할 때 누군가가 나를 혼내킨 거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둘 다 맞다. 주변 사람보다 내가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오는 타격감도 크고, 엄마는 한 때 나에게 '룸펜'이라고 한 적도 있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잊이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짧은 상담으로 내년 봄까지 편안히 쉬어보기로 한다. 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오래도록 달려온 나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로 해본다. 쉬는 동안 푸바오도 보러가고, 숲 길도 가고 해 보고 싶은 거 많이 해봐야겠다.


용기가 좀 더 생기면 본부장님에게 내 상황을 전달하고 좀 쉬겠다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나는 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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