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 3주를 마치고 토요일과 월요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러 갔다. 5시간, 3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기획한 프로그램은 좋은 파트너들과 동료의 도움으로 잘 마쳤고, 참여자 만족도도 높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점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나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을 하면서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무엇이든 느껴보려고 애썼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번째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에는 살짝 구토가 올라왔다. 그리고 점점 내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표정이 사라지는 느낌은 내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3차원인데 나만 하얀색 평면 도화지가 되었다가 점점 투명해져서 사라지는 느낌이다.
라이프쉐어라는 곳에서 나오는 다이빙노트를 쓰고 있는데 '일과 삶' 주제 관련 노트다. 일과 삶, 나의 감정에 관해서 5주동안 하루에 한 가지 질문에 답해보는 노트다. 7일째 쓰고 있다. 이를 통해서 내가 사람들의 성장을 돕고 기여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의 성장을 돕는 방법은 여러가지고, 나는 그 중에서 예술가와 기획자의 일적 성장과 네트워크 구성, 확산을 돕는 일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결국 사람을 남긴 프로젝트들이 좋은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일이든 그렇지 않겠나 싶다. 물건을 파는 일도 결국 사람을 남기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게 참 허무하다는 끝에 도달했고, 또 다시 표정이 사라졌다.
여기서의 끝은 보이는데 새로운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 뭔가를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준비를 하고 떠나지 않는 것에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겁이 많아져서, 현실을 너무 알아버려서, 이유는 많겠지.
구멍 뚫린 얼굴로 소파에 누워있다가 남편이 오고 나서야 표정이 돌아왔다. 남편과 있을 때만 표정이 돌아온다. 남편과 있을 때도 순간순간 표정이 사라지지만, 아직은 괜찮다. 표정이 사라진다는 건 컨디션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골짜기를 들어가려고 하나보다. 회사를 가서일까? 오전만 해도 다음 진짜 마지막 프로젝트가 있는 날까지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후에 구토가 올라오고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지막이 왔음을 감지했다. 신랑은 오전에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의사 선생님이 오래 쉬라고 했으니 이번엔 좀 푹 쉬라고 했는데 역시 그이의 말이 맞았다.
오늘 김창옥 TV에서 김창옥 씨가 알츠하이머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깊은 우울증을 뚫고 어떻게 나왔는지는 나에게도 큰 영향을 줬는데, 그렇게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쉬라고 말하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스트레스를 요인으로 짚으며 알츠하이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우울증 투약이 길어지고 증세가 지속될 수록 내가 혹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 등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닌지 두려워질 때가 있다. 수면제를 오래 먹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썰도 있어서 의사 선생님에게 확인도 했었다. 알츠하이머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모두가 그것이 발현되는 것도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발현될 수 있다고 하며 김창옥 교수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고백했다. 힘들 때 일이 더 잘 되고, 편안해지면 불안하고, 그런 모든 것들이 나와 비슷했다. 괴로울 수록 성과는 잘 나는.
이런 두려움을 가지라고 그가 병을 고백한 것이 아닐텐데, 그의 고백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그이와 사랑이를 산책시키며 더이상 표정이 없어지는 날 두고 보지 않아야겠다고, 더 이상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를 방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고, 이 둘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정신차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매듭에는 퇴사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