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
이번주 화, 수 회사에 갔다. 오늘도 가려고 했는데 못 갔다. 이제 프로젝트가 끝났으니까 마무리를 해야해서 가야하는데 못 갔다. 회사에 간다고 나와 부장님과 약속했는데 못 갔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 괴롭다. 사랑이가 다리에서 자고 있다. 들썩거리는 녀석의 등을 보니 사랑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궁금해진다.
약속을 지키는 건 무척 중요하다. 스스로 정한 일정을 지키는 게 자존감을 올리는데 중요하다. 하지만 유독 회사에 간다는 약속은 자주 못 지키는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해도 용인이 되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실망스럽다. 어릴 때 학교를 자주 못 갔다. 몸이 매우 약해서 코피를 한 바가지씩 흘리고, 감기를 달고 살며 매번 열이 40도까지 올라서 실려오고 하니까 조금만 아파도 엄마는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나도 학교를 가지 않는게 좋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하지 않아서 학교를 더 싫어했다. 그래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학교에 잘 갔다. 덜 아팠고, 중학교 때는 절친을 만나러 가는게 늘 좋았다. 고등학교 때야 뭐.. 그냥 다녔다. 대학교는 밥 먹듯이 학교를 안 갔고, 회사도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편이다. 뿌엥~!
그래도 가자고 맘을 먹었으면 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어제 18년을 회사에 다니신 분이 답글을 남기셨다. 우와.. 어떻게 18년을 다니셨을까. 나는 아직 쪼꼬맹이네.. 아빠는 40년 가까이 한 회사를 다니고 은퇴하셨다. 대단했다. 아빠도 회사 가기가 얼마나 싫었을까.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이 갖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빠는 말했다. "너희 때는 안 낳아도 된다. 아이를 나으면 물론 행복하지만, 7-80%는 괴롭다. 굳이 아이를 꼭 가지려고 하지 마라." 아빠도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나의 대학 졸업식 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말했다. "이제 돈 들어갈 일이 없어서 후련하다." 가장의 무게가 그렇게 무겁다.
나는 아이도 없고, 그럼에도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했으니까. 그리고 우울증 환자에게는 루틴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나는 이미 꿈을 이루었고,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고, 회사가 아니어도 내 삶에 루틴이 생겼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 회사는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직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이건 내 생활의 일부이니까 약속한 건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스스로에게 실망스럽다.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라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오늘하고 내일은 휴가를 내고 싶었더랬다. 그런데 휴가를 너무 조각을 내서 쓰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결국 오늘, 내일 휴가를 쓰게 되었고, 나는 첫 생각처럼 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자. '이래야 한다'에 방점을 두지 말고 '하고 싶다'에 방점을 두고 결정하자. 항상 마음의 소리를 듣고 약속을 하자.
7월부터 썼던 컨디션 일기를 읽어봤다. 점수가 10부터 90까지 들쭉날쭉이다. 하루는 좋았다가 하루는 나빴다가. 그 때까지만 해도 조울을 의심만 했는데 이제는 조울을 지나 잘 지내고도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6개월이 걸렸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하루하루 살아낸 나 자신을 칭찬하고 고마워하면서 내 마음을 더 잘 읽고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회사를 가고 안 가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내 마음을 돌보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