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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J Jan 03. 2024

당근을 선택했어요

[우울증 환자 생존기] 더 좋아하는 걸 선택하는 것

담배를 핀지 20년도 넘었다. 중간에 잠깐씩 안 핀 적이 있긴 한데 끊는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전자담배로 바꾸고 나서는 하루에 반갑은 핀 것 같다. 일어나서부터 잠 들 때까지 습관처럼 피는 타이밍이 있다. 게다가 전자담배로 피니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맘껏 피는 것도 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담배가 맛이 없는 거다. 진짜 맛이 없다. 술이 맛이 없어서 안 먹는 것처럼 담배도 맛이 없어서 안 필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담배를 계속 피고, 그러면서 맛은 없고.. 어쩌나 하던 참이었다. 


최근에 제주도 못난이 당근을 시켰다. 갈아먹는 용인데 그냥 먹어도 너무 맛있는 거다. 하루에 당근을 4개씩 먹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다래끼 나지, 발바닥 각화증 생기지 뭐지? 싶어서 당근을 찾아봤다. 당근은 안 좋은게 없다. 다 좋다. 대신 흡연자가 먹으면 암 발병률이 높아진단다. 그래서 담배를 버리고 당근을 선택하기로 했다. 맛없는 담배보다는 맛있는 당근이 더 나으니까. 뭐 사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20년도 넘은 습관을 당근 하나 때문에 바꿀 수 있다고는 나도 믿지 않으니까. 그래도 오늘도 뭔가 하나 더 좋아지는 걸 선택했다는 뿌듯함이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걸 선택했다는 뿌듯함. 


푸바오가 중국 가기전에 한달은 밖으로 안 나온다 한다. 이제 푸바오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망설이지 말고 당장 푸바오를 보러 가야겠다. 사랑이랑 갈 수 없어서 아쉽지만, 남편이 같이 가줄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쉽지만 혼자라도 보러가야겠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지. 의사 선생님이 뭐든 내가 좋아하는 것, 재밌어 하던 걸 다시 찾아서 하라고 했다. 푸바오는 내가 아픈 와중에 유일하게 온라인에서 위로를 주던 아이다. 중국에 가기 전에 꼭 보러가야겠다. 글을 쓰던 중간에 당장 앱을 다운로드 받아 다음주로 예약했다. 뭐든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움직이는 건 에너지가 나게 한다. 


최근에 낮에 잠을 많이 자서 밤에 잠이 오지 않고, 밤낮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패턴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아침에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늘 힘이 든다. 아침에 눈 뜨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뭔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그게 그렇게 하기가 싫고 모든 것을 다 취소하고만 싶다. 그래서 약속이 없는 날, 해야할 것이 없는 날이 좋다. 하지만 계속 이런 패턴으로 살 수는 없다. 이렇게든 직장인도 사업가도 생활인도 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찾아야겠다. 사람들 말로는 뜀박질 30분이 그렇게 좋다는데.. 나도 도전해볼 수 있을까? 몇 일전에 재떨이에 깔린 신문광고에 대구 마라톤 홍보가 있는 걸 봤다. 그걸 보고는 나도 마라톤하는 할머니가 되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지금은 무릎이 아파서 뛰기를 안 하고 있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마라톤을 뛰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럼 내일 당장 걷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담배끊기도 시작해보았는데, 걷기도 시작이야 해볼 수 있지 않겠나. 뭐가 되든 되겠지. 


더 좋은 걸 찾는 것, 내가 좋아하는 무엇을 찾는 것,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계속 시도해봐야겠다. 어쩌면 새로운 일도 더 좋은 걸 찾는 것 중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더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을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좋아하는 걸 찾을 수 있다면 대성공일 것 같다. 


무색, 무취, 무향의 텅빈 마음이 그래도 더 좋아하는 걸 찾아나설만큼 실체가 생겼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이제 어쩌면 조금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낯설고 어색하지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좋은 것들을 더 많이 찾아서 한 발씩 더 행복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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