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좋아지고 있는거겠죠?
주중에 상담과 병원을 다녀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상담에서는 요즘 컨디션 점수가 나쁘지 않아서 의식이 흘러가는대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안의 또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요즘 뭔가를 하고 싶은데 잘 움직이지 않는다. 몸을 안 움직이는 거다. 한편으로는 회사에 돌아가서 또 무기력이 찾아올까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의 게으름은 무기력과는 다른데, 회사에 가면 무기력한 내가 올까봐 두렵다. 게으름은 선택이라면 무기력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그냥 물먹은 솜이 되어버리는 거다. 그런데 나는 무기력은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무기력이라니! 채찍질하는 내가 있다. 무기력에도 임무가 있다. 나를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상처 입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 차라리 무기력이 등판하는 거다. 그러니 무기력은 죄가 아니다. 무기력은 고작 작고 솜털같은 아이인데, 죄라는 무거운 쇳덩어리를 등에 지고 버티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 짐을 내려주고 왔다. 무기력은 죄가 아니다. 추후에 무기력해지는 내가 오더라도 잘 돌봐주어야겠다.
약이 떨어져서 병원에도 들렸다. 지난 번에 점심약을 반으로 낮췄는데, 이번에는 아예 접었다. 불안증 약이었다. 집에만 있으니 불안이 높지 않고, 한번의 공황이 찾아오기는 했으나 약을 먹고 금방 가라앉았으니 약을 좀 줄여도 된다고 생각하신 듯 했다. 점심약이 특별히 작용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컨디션이 괜찮으니 약이 없어도 나쁘지 않다. 약을 하나 줄였다는 소식만으로도 그이가 무척 좋아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증표니까. 하지만 방심할 수 없기도 하다. 의사 샘도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아쉬워하셨다. 너무 짧다고.
12월부터 3개월을 쉬었다. 그냥 게으르게 쉬었다. 정말 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지냈다. 이런 시간이 진짜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 닥쳐오는 시간을 어떻게든 또 헤쳐나가야 한다. 지난 1년이 2~3년처럼 느껴지듯이 지난한 한 해를 보낼 수도 있고, 생각보다 괜찮은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3월에는 드디어 훌라 댄스를 배우기로 했으니 조금더 행복해질 수도 있다. 회사에 있는 내가 가끔 상상이 된다.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도 부딪혀봐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쩌면 인생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인생이라는 생각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약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가 한알 줄이는데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병가라는 극단의 조치를 통해서. 남은 약들은 어떻게 줄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밤마다 침대에 누웠다가 약을 챙기러 다시 나가는 일상을 언제쯤 그만 둬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어제 릴스와 유투브에서 본 바로는 운동을 하란다. 체력이 안 되면 마음도 약해지니까. 운동을 하고 몸이 좋아지면 마음도 강건해질 수 있다고. 운동이 답인가보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그래도 운동을 해야하나 보다.
약을 하나 접은게 나에게는 큰 상징이다. 좋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하지만 일상적으로 심심하고 뭐든 하고 싶어하는 걸, 신랑은 불안이나 강박이 아닐까 한다는데 불안증 약을 끊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상태로 좀 더 지내봐야 알 수 있겠지. 정신과 약은 나를 상대로 끊임없이 실험을 하는 기분이다. 그이와 좀 더 상의해서 정기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거를 찾아봐야겠다. 오늘도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