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어머니의 약바구니

(PP)

by 윤호준

어린 시절 내가 지켜본 어머니는, 늙어서도 다른 할머니들처럼 병들어 눕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작고 다부진 체구에 걸음걸이와 손동작이 빠르셨고, 새벽부터 밤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온갖 역경을 헤쳐 나가야 했던 탓이다. 아마도 어린 자식들을 조상님들 보란 듯이 잘 키워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금니를 악물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기몸살 같은 가벼운 증상이나 피가 흐르지 않는 크고 작은 통증쯤은 늘 일상처럼 안고 사셨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매일 체구 속 에너지를 다 쏟아내다 보니, 수십 년 동안 단련된 몸에도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다녀야 하는 병원이 늘어나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이 안방 곳곳에 쌓였다. 바구니 하나로 충분하던 약통은 어느새 두 개로도 모자라 수북이 채워졌다.


내가 군 제대를 하고부터 어머니의 병원 진료와 약품 조달은 전적으로 내 몫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가면 가장 먼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도는 것이 일과였다. OO대 병원, OO의료원, OO정형외과, OOO안과, OO치과, OOO이비인후과,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는 OO한의원이었다. 계절에 따라 다른 병원이 추가되기도 했고, 해마다 한두 번은 시술을 받아야 할 일도 생겼다. 특히 무릎 관절염 약은 수도권 OO대학병원에서 세 달 치를 처방받아 택배로 보내드려야 했다. 그렇게 쌓인 약과 비상약품들은 결국 전용 서랍장으로 번져, 마트에서 산 3단 서랍이 빼곡히 차게 되었다. 하루 종일 병원을 돌며 처방약을 받아온 날, 집에 돌아와 길게 내쉬던 어머니의 안도의 한숨.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매달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세월이 더 흐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늘 따라왔다.




시간은 어느새 나를 중년으로 만들었다. 젊은 날 숱한 술자리와 30년 넘는 직장 생활, 불행했던 가족사로 쌓인 스트레스가 겹치자 나 또한 약을 찾게 되었다. 30대에는 VDT 증후군으로 인한 어깨 통증과 두통에 시달렸고, 40대에는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했다. 50대에 들어서는 역류성 식도염을 비롯한 위장 질환들이 일상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은 인생의 자격시험처럼 긴장감을 안겼다. 그리고 2주 뒤 통보되는 결과지 앞에서는 늘 희비가 엇갈렸다. 그즈음이면 ‘새로운 병이 추가되지 않기만 바란다’는 소망이 앞섰다. 혹시라도 개선된 항목이 있으면 초등학생이 산수문제를 맞힌 듯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혼자 흐뭇해하기도 했다.


검진이 수치로 기록되면서 건강 관리가 체계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과도한 염려’라는 그림자도 따라왔다. 평균 수치를 넘으면 경고가 떨어지고, 개선 방안이 제시되는 건 좋지만, 때로는 당일 컨디션이나 며칠간의 생활 습관 탓에 나타난 수치 때문에 과잉 진단을 받아야 하는 부담도 컸다. 실제로 어떤 수치는 음식이나 수면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건강검진센터에서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1차 검진 후 1주일 정도 간격을 두고 간단한 항목만이라도 2차 검진을 병행하는 것이다. 수면내시경 전날 금식과 약물 복용으로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에서 진행되는 혈액·혈당·소변 검사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생명도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 위대한 위인도, 영웅도 세월 앞에서는 모두 낙엽처럼 스러졌다.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늙음과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돌보고 가꿔야 한다. 그 아름다움의 핵심은 결국 ‘건강’이다.


어머니의 약 바구니에 뒤섞여 있던 처방약을 정리해 드리며, 매일 약을 챙겨 드셨는지 확인했던 세월이 30년이었다. 이제는 내 방 침대 옆에 비슷한 크기의 서랍장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내가 매일 복용하는 약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고, 서랍 안에는 각종 보조제와 비타민, 상비약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세월은 그렇게, 어머니의 약 바구니가 어느새 나의 약 서랍으로 옮겨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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