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이센아저씨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중년의 길로 접어들자 삶을 돌아보는 기회도 잦아지는 것 같다. 이 세상을 떠날 때 흉터처럼 남을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은 상황들은 없었는지, 어떤 특정인과 기분 나쁘게 결별했던 일들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혹시 그런 기억들이 떠오른다면 곧바로 메모해 놨다가 가급적 빨리 화해하거나 반성하거나 혹은 회복하려고 한다. 그걸 모두 풀어내야 내 황천길이 떳떳하고 또 가벼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반성해야 할 것들을 한 가지씩 소환하여 가감 없이 고백하고 또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으려 한다. 그 첫 번째는 '이센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고백은 전적으로 개인으로서 회상하고 반성하는 것이며, 가족이나 마을 등의 집단적 동의는 전혀 없었음을 미리 밝힌다.



지리산 골짜기에 위치한 내 고향 집에는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 외의 어떤 아저씨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니, 함께 살았다기보다는 '전략적 동거'를 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우리 가족과 함께 삼시세끼 식사를 했고, 저녁이 되면 오래전부터 '사랑방'으로 사용하던 아주 작은 쪽방에서 거주하셨다.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어떤 특별한 사연으로 인해 함께 살게 된 '동거인'인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이창옥' 이셨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이센'이라 불렀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니, 아이들도 이센아저씨라 불렀다.


그런데, 최근 이센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3년 전쯤인가 요양원에 계실 때 병문안으로 찾아뵌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때도 이미 신체의 기능들을 많이 상실하신 상태라 내가 누군지 어렴풋이 알아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요양원이라는 곳을 생애 처음으로 방문했던 나는 그곳의 모든 광경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 내내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저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만 주고받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략 15분 정도 그렇게 서 있었을까? 이내 고갯짓으로 '이제 가겠다고' , '잘 계시라고' 인사를 하고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 시점에서 '이센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생각할수록 비겁했던 이센아저씨에 대한 무관심과 회피를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세상에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실 것을 염원하는 마음에서다.



아저씨는 늘 우리 가족과 함께 했었다. 거의 1년에 한 번가량 2박 3일의 여정으로 친척 집에 다녀오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마구간 옆 작은 쪽방에서 거주하셨다. 그러다가 마구간이 없어지자 아래 별채의 사랑방에서 거주하시다가, 그 아래채도 없어지자 다시 다른 별채를 개조한 '작은방'에서 거주하셨다. 밥상은 따로 사용했지만 식사도 늘 같이 하고, 온갖 집안 행사도 함께했다.



아저씨는 우리 집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촌집의 크고 작은 허드렛일까지도 담당했다. 아마도 농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날마다 노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때로는 우리 집에서 갚아야 할 품앗이를 다닌 적도 있었다. 아저씨와 함께한 시간은 가족처럼 많았지만, 대부분은 논밭에서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사계절을 나기 위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저 갈 곳이 없는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 후에야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아저씨와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끼니와 잠자리를 챙기기 위해 아프고 힘들어도 일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셨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반강제적으로 노동을 지시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다. 그 시절 어떤 합의나 계약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저씨가 이 외딴 산골마을에서 도피생활이나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어렴풋이 들었던 거 같다.



아저씨는 그렇게 매일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식사할 때나 만나고 헤어질 때의 표정이 항상 밝으셨다. 아니, 늘 특유의 웃는 표정을 보여주셨다. 특히, 내가 고향에 없던 시간에 발생했던 집안의 불협화음이나 작은 에피소드까지도 마치 개인 정보원처럼 슬그머니 나에게 전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짤막한 조언까지도 보태 주셨다. 아마도 당시 살얼음판 같았던 집안 분위기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보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오히려 내가 먼저 부재중의 사건사고를 여쭙고 또 협조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저씨가 일하는 들녘이나 논밭 한가운데 앉아서 얘기했다. 물론 오래도록 앉지도 않았고, 길게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늘 통상적인 몇 마디로 끝났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고질적인 집안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은 일치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싫다. 어쩌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반복되는 농사일을 해야 했던 쓸쓸한 분에게 내 입장에서 소소한 걱정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우리 가족의 부속품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이라도 그랬을까 봐 너무 무섭다.



어느 날 시작된 둘째 형님의 정치적 등장은 이 센 아저씨의 삶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미 행정당국의 시스템에서 말소되어 버린 아저씨의 호적을 부활시켜 준 것이다. 그때부터 아저씨의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당당히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모든 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다. 자치단체 및 종교단체의 지원품 그리고 노령연금까지 수령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여느 동네 어르신들 보다 윤택하게 보내셨다. 그래서 5일 장날이 되면 어김없이 구경을 나가셔서, 양손 가득 생선과 고기를 사다가 부엌에 놓고 가셨다. 게다가 시장에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국밥이나 짬뽕을 쏘기도 하셨다. 그리고, 아이들이 찾아오면 용돈도 쥐어주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말년에 그와 같은 작은 호사라도 누리셨으니 말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신분제도를 극복하고 일제 강점기의 치욕을 이겨낸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이 센 아저씨가 최근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극소수였기를 염원하면서 더불어 지금은 아무도 없기를 기원한다. 어릴 적에는 몰라서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성인이 되어서도 아저씨의 인권에 대해 방관만 하던 내가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산소에 찾아가서 잡초를 정리하고 소주나 한잔 올려드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결국 아저씨가 내 마음속에서 아쉽고 억울한 존재로만 남겨질까 봐 걱정된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나면, 다시 그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저 고향 마을을 방문할 때나 가끔씩 생각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라도 지금 당장은 어떤 형태로든 반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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