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어린 시절에 지켜본 어머니는 늙어서도 다른 할머니들처럼 병들어 자리에 눕지 않으실 것 같았다. 작고 다부진 체구에 걸음걸이와 손동작이 매우 빠르셨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린 자식들을 조상님들 보란 듯이 잘 키워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하루에도 수십 번 어금니를 악물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기몸살과 같은 사소한 증상들이나 피가 흐르지 않는 크고 작은 통증들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달고 사셨다.
그렇게 오랫동안 매일매일 작은 체구 안에 충전된 에너지를 다 쏟아붓다 보니, 수십 년 동안 단련된 몸에도 조금씩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정기적으로 다녀야 할 병원들이 하나둘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병원에서 처방한 약들이 안방 여기저기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해부터인가는 바구니 하나로 충분하던 약통이 바구니 두 개에 수북이 채워질 정도가 되었다.
군대를 제대한 직후부터 어머니의 병원 케어와 약품 조달은 전적으로 내가 담당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어머니를 모시고 시내의 병원들을 두루두루 투어하는 것이었다. OO 대 병원, OO의료원, OO정형외과, OOO안과, OO치과, OOO이비인후과 그리고 OO한의원이 마지막 종착지였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별도의 병의원이 한두 곳 추가되었으며, 해마다 한 두 번은 시술을 해야 할 일들도 생겼다. 게다가 무릎 관절염 약은 수도권의 OO대학병원에서 매번 3개월 치를 처방받아서 택배로 보내드려야 했다. 그렇게 처방약과 비상약품들이 바구니에 쌓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약품 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마트에서 구매한 3단 서랍장도 빈 공간 없이 꽉 차게 되었다.
하루 풀타임 투어를 통해 처방약들을 타오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셨다. 그 안도의 한숨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매달 고향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월이 더 흐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세월은 미운 강물처럼 흐르고 어느새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헤아릴 수 없는 술자리들과 30여 년 동안의 직장 생활 및 불행한 가족사로 인한 스트레스들이 축적되자 나도 하나둘씩 약이 필요하기 시작했다. 30대에는 VDT 증후군으로 인한 어깨 통증과 두통으로 시달렸고, 40대에는 고혈압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50대에 들어서자 역류성 식도염을 비롯한 각종 위장병이 일상생활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특히, 해마다 의무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건강검진' 절차는 꼭 합격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자격시험과 같은 긴장감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긴장감의 결과는 약 2주 후에 통보되는 '건강검진 결과서'를 보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그때쯤이면 건강이 좋아지는 것은 둘째고, 우선 안 좋은 부위가 추가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작년에 비해 개선된 항목이 있으면 초등학생이 산수문제를 맞히듯 빨강 크레용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흡족해했다.
그렇게 모든 건강 상태가 각 항목별로 수치화되니, 건강에 대해 개인적인 관리가 용이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오히려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증도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평균 수치가 초과되는 항목들에 대해 경고도 해주고 또 개선방안을 제시해 주는 등 도움을 받는 것은 좋다. 하지만 검진 당일의 컨디션과 특별한 상황들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비정상적인 수치들에 대한 의사들의 과잉조치를 수용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어떤 특정 항목들의 수치들은 당일의 컨디션과 며칠 동안 먹은 음식과 생활방식에 따라 좌우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건강검진센터'에서도 새로운 콘셉트의 프로그램들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검진 1차 일과 검진 2차 일을 지정하여 약 일주일이나 10일 정도의 인터벌을 두고 더블 체크하는 방식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혈액검사나 소변검사 등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검사들만이라도 말이다. 특히, 수면대장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전날부터 금식을 하고 헛구역질 나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면의 질이 최악이 될텐데, 그 상태에서 진행하는 혈액검사와 혈당검사 그리고 소변검사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생명이건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던 위인들도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전쟁 영웅들도 결국 세월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거역할 수 없는 늙음과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고 가꿔야 한다. 그 아름다움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누구에게도 건강일 것이다.
어머니의 약 바구니에 뒤섞여 있던 처방약들을 3단 서랍장에 정리해 드리고 또 매일 약 복용 여부를 전화로 체크했던 세월이 30년이었는데, 이제 내 방 침대 옆에 비슷한 크기의 간이 서랍장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서랍장 위에는 매일 복용하는 약들이 나만의 규칙에 의해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3단 서랍에는 각종 건강보조식품과 비타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상비약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