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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너도 그러니?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내 인생에서 최대한 많은 순간들을 공유하고픈 누나들 부부와 함께 1박 2일 여행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대표 도시인 경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이다. 약 35년 전 수학여행이나 혹은 15년 전의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았던 경주의 멋을 중년의 눈으로 노련하게 바라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경주의 이 다채로운 멋들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도 존재했고 또 우리가 한동안 방문하지 않았을 때도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방문을 통해 그동안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경주의 가치와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경주의 유적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그 존재 가치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재발견도 있었다. 그저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매우 사사롭거나 독특한 발견들이 놀랍고 또 반가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든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비단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구 혹은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시그널이 될 것이다.



누나들 부부와 함께한 여행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우리는 역시 한 핏줄임을 기분 좋게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너도 그러니? 응응. 누나도 그래?'를 반복하는 여행이었다. 그 내용들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동시대인들에 비해 다소 독특한 우리들의 습성이나 유별난 점들이다. 대부분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용들이라 공감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다소 싱겁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만나자마자 바로 일정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행선지는 지진에 의해 쓰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열암곡 마애불'을 근거리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산 주차장에서 다소 가파른 산길을 800m가량 올라야 했다. 우리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예기치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나들이 맨 앞에서 돌격대장처럼 날렵하게 산길을 타고 올랐다. 올해 환갑인 누나와 낼모레 환갑인 누나가 어떻게 저렇게 빠른 속도로 꽤 가파른 이 산길을 오를 수 있는지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 반가움은 바로 빠른 걸음걸이였다. 평상시 걸음걸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동행자들을 불편하게 했던 내가 아군들을 만난 것이다. 실제 우리 어머니께서도 평생을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사셨다. 건장한 청년들도 보조를 맞추기 힘든 빠른 걸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열암곡 마애불 앞에 도착한 후 누나들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이해한 듯 큰 누나가 그랬다. '너도 그러니?'라고 말이다.



불꽃같은 걸음걸이를 잠시 멈추고 다음 코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은 자형은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으니, 일정에 없었던 주상절리 전망대와 출렁다리를 구경하러 가자고 했다. 그 순간 3개의 감탄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출렁다리요?'라고 말이다. 최근 한국의 여러 관광지에는 출렁다리 테마가 시그니처 코스가 된 곳이 많다. 나는 그런 관광지에 가면 다른 급한 용무를 만들어 내거나 딴청을 피운다. 출렁다리를 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은 더더욱 싫다. 인간이 한없이 나약해지는 모습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악한 아이템임에 틀림없다. 나는 출렁다리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체의 힘이 모조리 빠져버린다. 그래서 누나들과 나는 동시에 소리쳤다. '우리는 출렁다리가 싫어요!'



나는 해외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소공포증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골프를 테마로 하는 해외여행이라도 마찬가지다. 솔깃할 수밖에 없지만 비행기 타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회사에서 5박 7일 호주/뉴질랜드 여행이라는 포상을 받았는데 즉각 거부한 적도 있다. 결국 주변 동료들의 설득으로 여행을 수용했지만, 역시나 편도 10시간의 비행시간은 악몽이었다. 출렁다리를 패스하고 자동차 안에서, '나는 비행기도 타기 싫어요!'라고 말하자. 누나들은 동시에 '응응. 나도 & 나도 그래'라고 힘주어 말했다.



빠듯한 일정으로 인해 유적지와 또 다른 관광지의 사이에 우리를 감싸고 있던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큰 자형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고 이동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누나는 아이스크림을 안 좋아하니, 5개만 사 올게'라고 말했다. 그러니 작은 자형이 덧붙였다. '누나도 역시 안 좋아하니, 4개만요!'라고 했다. 그러자 곧바로 와이프도 거들었다. '동생도 진짜 안 좋아하니, 3개만요!'라고 했다. 우리는 단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다음 코스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안압지(동궁과 월지)로 갔다. 연못은 어디에선가 벤치마킹 해보고 싶을 정도로 멋지게 조성되어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또 다른 위치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며 감탄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했다. 그리고 연못의 둘레길을 따라 돌아가자 형형색색의 대형 잉어들이 습관처럼 등장했다. 그 모습은 마치 광한루와 향원정 그리고 탄천에서 보는 그 모습과 비슷했다. 그런데 나는 연못을 향유하는 대형 잉어들이 싫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징그럽다.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여기도 역시나 대형 비단잉어들이 많이 있네. 난 이놈들이 왠지 싫어!'라고 말하자 누나들도 '너도 그러니?'라며 '관광지의 연못마다 대형 비단잉어만 키우지 말고, 다른 작고 귀여운 어종들도 길렀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환경적인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인지, 아직도 귀신이라는 존재의 유무에 대해 확신이 없다. 그래서 이따금씩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상갓집에 다녀오거나 혹은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것은 풍부한 상상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단연코 '전설의 고향'이라는 TV 프로그램이다. 제대로 화면을 바라보지도 못했지만, 그 소리와 분위기만으로도 순수한 동심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나는 아직도 '흔들리는 사철나무 소리'와 '내 다리 내놔' 그리고 '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매달린 여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말하자. 작은 누나가 '너도 그러니? 난 아직도 사람이 사망한 집에서는 잠을 못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인지 실내는 깔끔했지만 오래된 건물임을 여기저기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순서대로 세수와 양치를 하고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다과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길하게 모기의 잉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큰 자형이 말했다. '큰일이다. 누나는 저 모기를 잡아야만 잠들 수 있는데'라고 걱정과 장난이 섞인 말투로 던졌다. 나는 1초도 쉬지 않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잡을게요. 저도 저 모기를 잡아야 잠들 수 있거든요'



나는 지리산 산골 출신이다. 온갖 곤충들과 야생 동물들 그리고 가축들과 함께 공생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뱀과 지렁이를 매우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가만히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특히 지렁이는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딱 하나다. 도시에 살면서 보도블록이나 골목에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상처받아 온몸을 비틀며 발악하는 지렁이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렁이를 보면 그런 처량한 모습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왜 땅 위로 올라와서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숙소의 산책길에서 그 위태로운 지렁이들을 피해 가는 나를 보며 '너도 그러니? 말도 마라'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이번 여행 이후에 하루하루를 자극하는 두 귓가에서 종일 맴도는 말들이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그저 흐뭇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응원이 되기도 한다. '너도 그러니?' , '누나도 그래?' , '응. 나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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