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어느 늦여름 밤에 TV 드라마를 보다가 "이 아이는 평생 자기 방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이렇게 죽고 나서라도 방을 만들어 꾸며 놓았고, 어느새 10년이 지났는데 방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늦더위에 이내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생각해 보니, '나도 여태 내방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 생활하면서 그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의 파란만장했던 내 삶을 되돌아보니 정말로 나는 지금껏 '나만의 방'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에구 이를 어째...'
나는 지리산 인근의 전형적인 고랭지 농촌마을에서 추수가 마무리될 무렵에 태어났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내 위로 7명의 형들과 누나들이 먼저 태어나 한 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 고향 집에 방이 네 개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린 남매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잘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비록 비좁았지만 매일 밤이 시끌벅적하고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큰애와 막내가 20년이나 차이가 났기에 밤마다 동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합죽이가 됩시다'라고 선창 하면, 모두가 '합!'을 후창 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한 두 명씩 잠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몇몇은 계속 속삭였고 또 몇몇은 낄낄거렸다. 그때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면, 온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논두렁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 누나 둘과 형이 먼저 가 있었기에 총 4남매가 단칸방을 얻어서 살았다. 그 당시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 행복과 가치의 정도로 보면 그 시절이 가장 인간적이었다. 형편은 거의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네 명이서 서로 의지하며 참 재미있게 살았다. 내가 군대 갈 때까지 6번을 이사를 다니며 조금씩 전셋집을 넓혀나갔다. 그렇긴 했지만 5번째 이사할 때는 형과 같이 방을 썼고, 6번째는 누나 집에서 친구와 함께 같이 방을 쓰다가 또 둘이서 자취를 하기도 했다. 그때 내방은 가끔씩 공부나 음악 감상하러 올라간 다락방이거나 혹은 초등학교 옆 매우 길고 가파른 계단의 끝단이었다.
재수를 하고 겨우 입학한 대학교가 개강을 하기도 전에 밴드에 들어가 1.5년 동안 음악에만 전념하다가, 학사경고를 두 번 연속해서 받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입대를 결심했다. 그렇게 자원입대를 했는데,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시력의 수치가 범위 내에 들어가니, 고향으로 돌아가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게 어떻냐고 권고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현역으로 군생활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진짜로 남게 해 주었다. 그렇게 28개월의 군생활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나의 룸메이트는 14명이 되었다. 그때 나만의 공간은 화장실이거나 쓰레기소각장이었고 또는 새벽 2시의 초소였다.
그리고 그렇게 학창 시절과 군생활을 보내고 공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운 좋게 합격하여 서울로 취직했다. 낯선 서울에서 방을 얻어 살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처음 몇 달은 큰누나 집에서 조카와 함께 방을 썼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솔로를 위한 생활관'을 개관하여 오픈하자마자 입소했다. 그런데 그 생활관도 2인 1실이었다. 그때 지금도 잘 지내는 친구 '춘홍이'와 참 재미있게 보냈다. 생활관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또 진지하게 세상의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그때 나만의 공간은 누나 집의 옥상이거나 생활관 식당에서 강변역 야경이 보이는 구석자리였다.
서른한 살에 결혼을 했다. 신혼살림은 봉천동 가파른 언덕배기의 다가구 주택의 2층 한편이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할 때나 집을 구할 때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본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자존감이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공통분모이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저축해 놓은 약간의 돈(대부분 와이프가 모은 것)과 대출로 방을 구했고, 액면상의 방은 3개였지만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방은 한 개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곧잘 울먹이게 된다. 그때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아픈 시기였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두통으로 인해 3년간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와이프는 나를 저버리지 않고 묵묵히 돌봐줬다. 왜 그렇게 아팠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말끔히 나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괜스레 와이프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2년을 살다가 바로 신도림역과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목동에서 4년 살았고 그 후 분당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그렇게 아파트로 이사하고 난 후에도 '당연히?' 내방을 가져본 적은 없다. 아니 내 방을 가질 이유나 의미가 없었다거나 혹은 그동안 내방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방이 4개인 아파트에 살지만, 그래도 내방은 없다. 이 시절의 나만의 공간이라고 하면 아마도 마음껏 노래 부를 수 있는 자동차 안 이거나 탄천 산책길이거나 불곡산 등산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방에 대한 욕심은 없다. 아마도 그동안 내 마음속 공간을 내 나름대로 잘 꾸며 놓았고 또 상황에 따라 스스로 좋아하는 구도나 색상으로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무장되어 있어 특정한 공간의 의미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언제일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죽음 이후에 맞이할 고독과 자유에 대한 기대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아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나의 육신을 가족 묘지나 납골당에도 두지도 말고, 내가 살아온 이 세상에 흩뿌리라고 했다. 그러니 죽고 나면 이 세상이 내 방이 될 것이다. 고독이 깊고 자유가 넘치는 내 방이 될 것이다.
P.S.
지금까지 군대의 막사를 제외하면 약 21개의 다른 공간에서 살았다. 이 숫자는 가난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다양한 공간 자체와 그 공간과 함께 어울려져 있는 다채로운 환경이 참 좋았다. 그 추억들만으로도 이미 인생이 넉넉하다. 지금의 직장에서 퇴직한 이후 한동안에도 그러한 넉넉함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