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며칠 전부터 갑작스럽게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길게 버텼던 겨울이 물러가고 드디어 봄이 왔다는 것이다. 이런 계절이 오면 내 몸이 저절로 원하고 반응하는 음식들이 있다. 도다리쑥국, 머위 무침, 달래장, 두릅, 다래순, 냉이된장국 등이다. 계절 음식, 제철 음식이 몸에 좋은 건 누구나 다 안다지만 풍미를 제때에 챙겨 먹을 수 있는 여유와 수고를 가진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향기로운 음식들을 마주하면 누구든 봄의 화사한 꽃무리처럼 얼굴이 활짝 꽃 핀다. 정말 좋다. 추운 겨울 동안 마음껏 휴식을 취한 대지나 나뭇가지를 비집고 오르는 새싹들로 만든 봄 음식은 그 자체가 바로 보약의 잔칫상이다.
오늘 아침에 그 봄의 잔칫상 앞에 앉았다. 평상시에는 6시 정도에 집에서 출발하는데, 오늘은 회사에 행사가 있어서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되는 여유로운 날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근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문틈으로 내가 기다리던 봄의 향기가 스멀스멀 들어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청중이던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다큐에서 연출하는 각종 토종 음식들로 인한 착후 현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코 앞의 향기는 그렇게 착각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안방의 문을 열고 부엌을 바라보니 정말로 화려한 꽃들의 군락처럼 '봄'이 찾아와 있었다. 오늘 아침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견과류 1 봉지와 사과 반 개로 대신했던 내가 머위 무침과 달래장 그리고 표고버섯볶음과 냉이된장국을 한꺼번에 먹었으니 말이다.
그 감동이 의미를 더하는 이유는 어제저녁의 이벤트 때문일 수도 있다. 협력사 미팅이 다소 늦어져서 집에 도착하니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오늘은 뭘 먹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부엌을 향하는데, 가스레인지 위에 '재래식 탕국'과 '스테이크'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침 카톡이 와서 내용을 보니 아들의 메시지였다. '시골에서 제사 모시고 아빠가 참 맛있게 먹었던 '탕국'을 끓여봤어. 그리고 스테이크는 요즘 인근 마트 정육코너에서 할인행사를 하길래 3인분 사다가 구워봤어. 맛있게 먹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 내가 늘 그리워하던 음식중의 1순위는 탕국이었다. 그 추억의 탕국은 명절이나 제사 후에 친척분들과 빙 둘러앉아 나눠 먹었던 그 탕국보다 훨씬 맛있었고, 스테이크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의 부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보통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공간은 거실이지만, 우리 세 식구는 부엌이라는 공간을 잘 이용한다. 맞벌이 부부에 대학생 아들이라는 환경적인 특수성이 작용을 했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쉽지 않은 집안 분위기다. 먼저 나는 주말 아침 식사 준비를 담당한다. 일단은 해조류가 건강에 최고라는 생각이 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미역국을 끓인다. 나는 실제 자타가 인정하는 해조류 예찬론자다. 그래서 다양한 미역국을 계속 실험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황태와 월계수 이파리를 넣은 미역국에 빠져들고 있다. 물론 내가 자신있는 요리는 미역국, 김치찌개 그리고 볶음요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제철 음식들을 현지에서 조달한다. 계절에 따라 별미로 먹을 수 있는 농, 수, 축산물을 미리 배달시켜 주말에 활용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아들은 또래 친구들과는 사뭇 다르게 요리에 관심이 많다. 실제 초등학교 3, 4학년 때는 '성인반 요리학원'에 보내달라고 고집을 부려서 1년 정도 다니기도 했다. 그 후에는 음식 재료들만 적절히 준비해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곧잘 요리를 해서 먹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들이 만든 음식들은 거의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미식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감동한 적이 참 많았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는 와이프의 생일이었다. 아들이 엄마에게 생일을 맞이하여 어떤 음식이 먹고 싶냐고 물었다. 예전에 먹었던 '전통적인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날 저녁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훌륭한 맛의 '수제비'를 내놓았다. 나도 덩달아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언제 취업이나 창업을 하고 누굴 만나 결혼을 할지 아직 불확실하지만, 그은 결혼을 해서도 참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요리를 잘해서가 아니라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는 말이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집 부엌의 대장은 와이프다. 신혼 초기에는 음식에 대한 감성은 크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어떤 음식도 뚝딱뚝딱 잘해내는 전문 요리사가 되었다. 그래서 어쩌다 내가 퇴근 후 혼밥을 할 때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놓으면 식탁이 가득 찬다. 아마도 내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최대한 모두 활용하는 반찬 다다익선 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 식탁의 가장자리에 소주 한 병을 놓고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공유하면 난리가 난다. 그 반찬들 중에 값비싼 식재료는 거의 없지만 다양하게 나열해 놓고 골고루 즐기면 위장뿐만 아니라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그러니 아버지 제사를 모실 때도 걱정이 없다. 각종 과일과 생선 그리고 떡은 재래시장에서 공수해 오지만, 해마다 메인 음식 3가지가 별도로 준비되기 때문이다. 실제 그 3가지 음식이 제사음식의 시그니처이자 하이라이트다. 우리 식구 3명이 각자 한 가지씩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제삿상에 올리기 때문이다.
암튼 우리 식구의 부엌은 외롭지 않다. 이용률의 편차는 있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가 조화롭게 잘 활용하는 건강의 공간이자 화목의 공간이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이러한 부엌 활용 모드가 참 좋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있어 부엌이라는 공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해괴한 시절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쉽게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자가 오히려 외로워지고 불쌍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부엌은 생명의 공간이고 문화의 공간이고 가족애를 위한 복합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의 부엌은 매일 웨이팅 상태다.
P.S.
그래도 문제는 있다. 내가 음식을 한 후에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은 요즘 엄마를 생각해서 요리 후에 설거지까지 마무리하여 깨끗한 싱크대를 넘겨준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그게 잘 안된다. 어떻게 하면 설거지까지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