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응급구조용 백팩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려고 적당한 가방을 찾다가, 수납장에 있는 여러 용도의 대상들 중에서 가장 마땅한 스타일의 가방을 발견했다. 그런데, 다른 가방들은 텅 비어서 홀쭉해져 있는데, 유일하게 그 가방은 이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듯 겉모양이 빵빵했다.


곧이어 수납장에서 그 가방을 꺼내면서 느낀 묵직함과 익숙함에 저절로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지난 겨울에 자주 이용했던 집회 참가용 백팩이었던 것이다. 가방을 열어 물건들을 방바닥에 다 쏟아보니, 아스팔트용 깔판, 우의, 넥워머, 보온용 모자, 손난로, 촛불 모양의 형광등 그리고 응원봉 등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간식용 초콜릿과 하루견과 그리고 홍삼 스틱까지 들어있었다.


그 물건들을 하나둘씩 들어서 살펴보니, 최근 십여 년간 참여했던 집회 현장의 치열하고 절박한 모습들이 마치 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한참 동안 수많은 극적인 장면들이 지나갔다.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하고 또 결혼을 하면서 정상적이고 희망적인 사회에 살고픈 평범한 시민들에게, 지켜만 볼 수 없었던 분노와 저항의 장면들이 있었다. 광우병 사태, 세월호 참사, 국정 농단, 조국 사태, 이태원 참사, 12.3 내란 사태...



그럴 때마다 와이프와 나는 조용히 그 백팩을 꺼냈다. 와이프와 나는 정치적 아니 정의적 동지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다 같이 잘 사는 국가를 지향하는 소박한 희망의 동지다. 여태 그런 측면에서 서로 의견이 엇갈린 적이 없었다.




국민이 주인인 상식적인 사회의 구현을 희망하는 가치관 이외에 우리 부부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빚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30년 직장 생활에 그 흔한 마이너스 통장도 이용하지 않는다. 돈 걱정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갚아 나가야 할 빚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말없이 백팩을 챙기듯 빚지고 사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렇게 빚지고 사는 것을 싫어하기에 내 나라의 민주주의도 지키고 싶었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시키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했다. 내 의지가 허락하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한, 세상에 프리라이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집회용 백팩을 챙겨두는 것이다. 물론, 그 사용 대상은 특정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 등 별 차이도 없는 이념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정의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는 그 '사회 응급구조용 백팩' 속에 들어 있는 집회용품, 소품, 비상식량 등을 꺼내어 튼튼한 종이박스에 담아서 테이핑을 하고 창고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창고를 비워야 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번 정부에서는 이 종이박스를 꺼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다음 정부에서도 그 박스를 찾지 않길 바란다. 낡은 카세트테이프처럼 이제는 세상에서 필요 없는 옛 물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P.S.

아마도 우리 집처럼 집회용 백팩을 준비해 놓은 가정이 많았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믿기지 않은 파란만장한 일들이 마치 영화처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집회에 가서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다양한 물건들을 철저하게 준비해 오시는 분들이 참 많았다. 우리 부부도 허락이 되는 선에서 참여하긴 했지만,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 그분들도 나라를 살리기 위한 응급구조 백팩에서 물건들을 꺼내어 창고에 보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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