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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추석은 온 마을의 축제였다. 추석 전날이면 동네 어귀 당산나무 아래 길게 이어진 콘크리트 턱에 둘러앉아 가을걷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면 반년 만에 고향을 찾은 이웃과 친척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다. 마을의 모든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당산나무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나가면 “너 ○○집 ○○ 아이 아니냐, 잘 있었냐?” “그래, 지금은 어디 사는가?” 하고 묻고는 거친 손바닥으로 악수를 나눴다. 이내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덕석을 펴고 흥겹게 윷놀이가 시작됐다. 감나무집 할아버지는 오후 내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사카린 막걸리를 따라 주고 묵은지를 건네주셨다. 그 시절 추석 연휴 동안은 모두가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다. 다들 웃음 띤 얼굴과 상기된 목소리로 서로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참 좋았다. 전통처럼 마을 모두가 그렇게 추석을 맞이했다.
타향에 살던 이웃사촌들이 하나둘 돌아오면 마을은 금세 가득 찼다. 큰길과 골목마다 자동차로 빼곡했고, 오래 비어 있던 작은방과 사랑방에도 가족과 친척들이 들어찼다. 그날 밤의 보름달처럼 동네는 환하게 차올랐다.
낮에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풍경을 지켜보다가, 저녁이면 마을 뒤 언덕 가장 높은 논둑에 올라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추석 전날이면 집집마다 아궁이에 큰 솥단지가 걸리고 장작불이 타올랐다. 굴뚝마다 흰 연기가 피어올라 마치 평화와 축복의 연무가 온 동네를 감싼 듯했다. 소나무 장작 타는 냄새는 솔바람을 타고 마을 전체에 퍼져 나를 앉은 언덕까지 스며들었다. 황홀하기까지 한 향이었다. 그 사이 간헐적인 산새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뒤섞여 마치 4DX 영화처럼 감각을 자극했다. 나는 땅거미가 완전히 지고 골목이 한산해질 때까지 그 ‘특별석’에 앉아 있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작은아버지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계셨다. 밤늦게까지 친척들이 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셨다.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은 영원할 것 같았다. 마음이 좋으신 작은아버지를 보며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늘 안쓰러웠다. 여덟 남매를 혼자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친척들이 선물을 들고 속속 도착했다. 볏짚에 묶은 돼지고기, 마대자루에 담긴 햅쌀, 거꾸로 매단 토종닭…. 크진 않아도 소중한 것들이었다. 이웃과 친척들이 모이면 대화는 늘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덕담을 주고받고, 마을의 경사를 회고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했다. 모두 힘든 시절을 살고 있었기에 명절만큼은 아픔을 꺼내지 않고 즐겁게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추석 아침이 밝으면 집안은 북적였다. 아버지 삼형제의 자식들만 모여도 21명, 손주 세대까지 더하면 대군이었다. 모두 함께 차례를 지내면 뼈대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향불과 촛불 가득한 방에서 장성한 남자 스무 명이 동시에 절을 올리면, 마룻바닥이 울리는 듯했다. 이내 성묘 길에 올라 트럭 짐칸에 나눠 타고 동네를 지나가면 집안의 기세가 느껴졌다. 다른 집안 무리와 마주치면 은근히 어깨가 올라가기도 했다.
성묘 후에는 차례 음식으로 점심을 나눴다. 특히 큰형수님이 끓여둔 탕국 맛이 잊히지 않는다. 전날 밤 끓여 아침에 차례상에 올리고, 점심에 다시 데워 내던 그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점심 후에는 대문간에 둘러앉아 정치와 건강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 논쟁은 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반면 건강 상식은 꽤 쓸 만했다. 각자 사회에서 터득한 지혜가 모여 작은 백과사전 같았다.
그리고는 장화나 등산화를 신고 뒷산으로 향했다. 추석 산은 먹거리 천국이었다. 송이, 싸리, 목이버섯, 더덕, 도라지, 둥굴레, 머루, 다래, 으름, 오미자…. 심지어 어떤 해에는 산삼까지 발견했다. 사촌이 두 뿌리를 발견해 모두 함께 나눠 먹었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효능보다도 추억이 영원한 힘으로 남았다. 또 다른 해에는 형수님들과 따온 송이버섯으로 끓인 야생 버섯국이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추석의 풍성함은 차례상 음식 때문이 아니었다. 들판의 곡식과 과일, 산이 준 선물, 그리고 나눈 덕담 덕분이었다.
추석은 그때까지가 다였다. 그 산행이 끝나고 내려오면 벌써 많은 자동차들이 도시를 향해 떠나고 없었다. 골목이 조금씩 비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그 상황을 알고 계셨다. 어젯밤 늦게 자식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햅쌀, 배추김치,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무말랭이, 햇고구마, 밤, 호두, 묵, 홍시, 단감,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가져온 과일과 통조림까지도 똑같이 나누어 빼곡히 담아두셨다. 어쩌면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마음보다 자식들에게 수확물을 한아름 안겨 보내려는 마음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언제 떠날지 알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셨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준비한다고 해서 괜찮아질 리는 없었다. 날이 밝으면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을 쓸고 자식들과 손주들의 신발을 일일이 털고 닦아 놓으셨다. 이별을 준비하는 신호였다. 그리고 추석날 아침이 되자 어느새 축제의 절반쯤은 추억으로 바뀌고 있었다.
예정대로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나섰다. 모든 헤어짐은 해 뜨기 전 새벽에 하는 게 좋았다. 우리의 감정이 아직 다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이셨다. 그래서 서로 가급적 아무 말도 내놓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가능한 빨리 차를 움직였다. 저 멀리 모퉁이 끝까지 달려가 룸미러로 뒤를 보면 어머니는 그대로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걸 알면서도 손을 흔들다가 끝내 주저앉으셨다. 모퉁이를 도니 잠시 다니러 왔던 자동차들로 가득했던 골목과 도로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비어진 골목은 어느새 말려야 할 곡식들로 채워졌다. 남은 분들은 짧았던 추석의 추억을 잊기 위해 서둘러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산으로 향했다. 허리의 통증으로, 무릎의 시림으로, 등줄기의 땀방울로 그리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추석의 추억은 짧고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