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도 가벼워지지 않았던 이유

집은 비어가는데, 하루는 그대로였다

by 조용한 선택

물건을 비우기 시작한 뒤에도
나는 계속 피곤했다.
집은 점점 비어갔고,
정리해야 할 것도 줄어들었는데
하루는 이상하게 그대로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덜 비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줄이면

조금만 더 버리면
이 피로도 같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이 피로는 집 안에서만 생긴 걸까
그러다 문득
가만히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됐다.
이 피로는
집 안에서만 생기는 걸까.


동시에 빠져나오지 못한 자리들


곰곰이 떠올려보니
나는 동시에 여러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원가족 안에서의 역할,
결혼 이후 자연스럽게 늘어난 관계들,
엄마가 되고 나서 생긴 커뮤니티,
그리고 이미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일의 자리까지.


하루 안에서 여러 사람이 되는 일


나는 하루를 살면서
여러 곳에서
각각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는 딸이었고,
어디에서는 며느리였고,
어디에서는 엄마였고,
어디에서는 여전히
일을 놓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건이 줄어들수록 또렷해진 것


물건을 비울수록
이 구조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집은 조용해졌는데
내 하루는 그렇지 않았다.
정리하지 못한 것들은 집 밖에 있었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정리하고 있던 건
물건이 아니라
집 안의 공간이었고,
정작 나를 지치게 하던 것들은
그 바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걸.


그래서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더 비울지보다
어디서부터 내려놓아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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