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처럼요.
내 머릿속에는 '기억 무한 반복' 재생 기능이 존재한다. 그날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기억을 곱씹는 편이다. 누군가와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대화의 기억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관계없다. 나는 그저 그 순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내 머릿속으로 가져와 반복해 재생한다. 물론 일시정지 기능은 없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무수하게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할 걸 그랬나? 이런 반응을 했어야 했나? 그게 그런 의미였나?' 가끔은 이어가지 못한 대화를 상상 속에서 혼자 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사람과의 만남은 늘 피로하게 다가왔다. 한 번의 접촉은 오랜 시간 나의 온 마음과 정신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좋은 대화였던 경우엔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쁜 대화의 기억을 회상할 때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씁쓸한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잊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의지로 그럴 수만 있었다면 이런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밥 먹고 일하며 일상을 보내면서도 무한 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오면 이전 기억이 옅어지긴 했지만, 리플레이되는 기억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 나는 진정으로 과거에 사는 사람이었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하면 영혼이 건강해진다.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에서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는 나에게 힘겨움으로 다가왔다. 사람과의 만남이 자제할수록 영혼이 건강해진다는 건 정말 내 얘기였다. 하지만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 않는 이상, 사람과의 만남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터, 가족, 모임 등 모든 곳에 만남이 존재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모나지 않고 둥글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만 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내 마음을 간파라도 한 것처럼 직설적으로 꼬집는 책 속 글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교성은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위험하면서도 해롭다. 비사교적이라는 것은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큰 행복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뇌는 교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에서 -
나의 고정관념은 나를 더 갈아먹고 있었다. 사교적인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나의 얄팍한 생각이 나를 더 괴로움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이건 '반복 재생'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기억 간의 나름의 경중은 있었다.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됐고, 나에 대한 평가가 포함된 말을 더 오래 기억했다. 부정적인 평가인 경우에 더더욱 말이다. 특히 상처되는 말은 잊지 못했다. 나에게 중요하거나 내가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는 좋은 말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중요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비난이 더 아프게 꽂혔다. 그러지 말자고 자책했지만 굴레에서 빠져나오긴 쉽지 않았다.
나는 왜 다른 사람의 판단에 휘말리는 것일까?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울고 웃는 것일까? 왜 그들의 눈웃음에 화가 나고, 그들의 존경 어린 시선에 우쭐해지는 것일까? 내 삶을 평가하고 재단할 권리가 내게 있음에도 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도 그들이 바라보는 나를 더욱 사랑한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정직하지가 못했다. 내가 정직한 인간이었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높게 평가하는 데에 두려워했을 것이고, 나를 비웃는 조롱에 감사했을 것이다. 작은 비판에 분노하고, 입에 발린 칭찬인 줄 알면서도 교만했다.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에서 -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 그들이 바라보는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것,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 나에 대한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버린 것, 전부 내 얘기였다. 그러다 보니 만남은 나를 늘 불안하게 했고,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어느 순간 만남 자체를 가급적이면 회피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30년 넘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이 '인지'했다는 것 만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 수는 없었다. 먼저 찾은 방법은 나를 위험한 곳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 선택적 회피다. 모든 사람과의 소통을 차단하기보다, 긍정적인 사람들과의 소통 경험을 늘려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긍정적인 기억이 쌓이면 더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늘 좋을 수 없고 가까운 관계에서도 막연히 이해해 줄 거라는 판단으로 무심코 던지는 말과 무심한 행동이 있을 수 있으니, 부정적인 것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리고 부정적 기억은 언제든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와 나를 옭아매고 내 하루를 삼켜버릴 것이다.
결국 내가 겪는 이 무한 반복의 굴레가 어쩔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 대신 한 발짝 떨어져 기억 재생을 지켜보는 것이다. 매번 그 기억 속에 들어가 반복해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려고 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비극이 희극으로 바뀔 때까지, 내가 그 기억을 희극으로 넘겨버릴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