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는 하나가 아닙니다.
“담하씨는 늘 차분해서, 화내거나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은 사실과 다르다. 나는 좁은 지하철에서 누군가 밀치면 화가 난다. 길을 가다 어깨를 부딪히고도 사과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상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면 눈길이 날카로워지고, 공공장소에서 예의 없는 행동을 보면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렇게나 화가 많은 나에게 차분하다니.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만 짓는다. 나에게 사회란 대체로 그런 태도를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고, 거절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가식적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예전보다는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법을 익혔을 뿐이다. 그렇게 사회 안에서 지내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 생겼고, 그 모습은 ‘진짜 나’와 조금 달랐다. 어느 순간에는 조금 많이 말이다.
사회에서의 내 모습과 실제 나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스스로가 위선적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숨기고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 같다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차분하게 생각하지만, 실제의 나는 불안한 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불안을 감추고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기대하는 대로 늘 차분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들기도 했다. 차분함, 그건 나의 페르소나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페르소나, 즉 사회적 인격과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동일시합니다. 또 자기 스스로도 마찬가지죠.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과 본래 내 모습이 같지 않으면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교사는 교사다운 인격을, 부모는 부모다운 인격을 가진, 특별히 더 성숙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살아요. 물론 직업에 맞는 페르소나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죠. 소위 우리가 말하는 '그런 척'하는 게 위선이 아니라 정말 노력하는 모습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추구하는 페르소나와 나 자신의 인격을 완전히 일치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하루 24시간 나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내내 항상 받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정우열의 <힘들어도 사람한테 너무 기대기 마세요> 중에서(p.28~29)-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면을 쓰는가, 아니면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억누르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점점 후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페르소나가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고 있었다. 사람은 응당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하나의 모습만을 유지하려다 보니 오히려 경직되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의 나, 일할 때의 나, 친한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하나로 고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는 하나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페르소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적절히 도구로 활용하면 강력하지만, 페르소나와 나 자신의 인격을 완전히 일치시키려고 애쓰거나 내 정체성으로 믿어버리면 그 순간 위험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인 것 같다. 나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필요할 때만 켜는 도구로 쓰기로 했다. 퇴근하면 끝, 집에 돌아오면 off. 전자기기의 전원을 끄듯이 역할이 끝나는 지점을 분명히 정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로부터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것. 아무 역할도 안 해도 되는 공간에서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굳이 차분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있다. 표정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말투를 고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 오늘 하루 동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화가 났다는 사실도, 불편했다는 감정도 그제야 허락된다. 이 시간만큼은 어떤 사람도, 어떤 역할도 아닌 그냥 나로 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