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행복이란 막연하게 이뤄야 할 목표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별생각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요‘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나는 행복을 글로만 배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행복은 원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기승전결 같은 서사가 있어야 하고, 수많은 고비와 단계를 거쳐야만 쟁취할 수 있는 존재인 줄 알았다. 힘들게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면 나도 행복해질까, 원하는 대학에 가서 자유로운 캠퍼스 생활을 즐기면 행복해질까, 취업해서 받는 월급으로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사고 싶었던 물건도 실컷 사고 나면 행복해질까. 나의 행복은 항상 미래에 있었다.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하다는 기분은 잠시였고, 이내 사라졌다. 성적을 잘 받으면 다음 시험을 망칠까 두려웠고, 자유로운 캠퍼스 생활이라는 핑계로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취업해서 받는 월급은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데 불과했다. 이쯤 되자 도대체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먼 미래의 행복을 꿈꾸고는 했다. 행복은 그렇게 신기루처럼 저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잡으려 하면 할수록 잡히지 않는 듯 했다.
그렇게 잡히지 않는 행복을 꿈꾸면서 그저 남들이 사는 대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살아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은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며 불행하다고 여기던 나에게 지금도 충분하다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처음 품에 안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꼬물거리는 손과 발, 나를 빼닮은 듯한 눈코입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미래의 행복을 향하던 나의 시선은 지금 이 순간을 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말하던 날, 첫발을 떼던 순간, 아장아장 걸어서 나에게 안기던 기억. 사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나에게는 어릴 적의 나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느라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던 부모님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다정한 애정 표현 같은 건 해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투박했던 부모님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사랑의 표현을 아이에게 해주면서 사실은 내가 위로받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도 어릴 적의 나를 이런 눈으로 바라봤겠구나. 나도 사랑받고 행복하게 자라왔구나.‘ 그제서야 행복은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이 내 안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행복도, 불행도 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졌다.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여행이 갑자기 취소되었을 때도, 둘째를 낳으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도 나는 그 속에서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여행을 못 가서 돈이 굳었으니 그 돈을 모아서 다음에 더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면 되고, 직장은 그만두었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해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게 내가 행복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고 행복이 어딘가로 숨어버린 듯 느껴질 때면 나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는 한다. 온통 나로 가득 찬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그래 행복이 여기 있었지, 하고 나 자신을 다독이고는 한다. 행복은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머물러 있다는 걸,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에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에도, 꼭 맞잡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도 행복은 묻어있다는 걸 아이를 보면서 다시금 되새긴다. 내 아이도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너무도 불행해지기 쉬운 세상에서 멀리 있는 행복만 좇지 말고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행복도 찾을 줄 아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의 행복을 조용히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