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입을 빌어 말해보는
고전이란 단어에 어울릴만한 책을 몇 권 읽지 않았음에도 고전에서 기억할 수 있는 구절이 거의 없는 나의 독서력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기억나는 글귀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흘렀기에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허균의 글이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다음 내용이 허균의 어떤 저작에 나오는 것인지 아는 분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예(禮)나 도(道)로 포장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모든 것은 결국 밥의 문제이다"
그때부터 나는 어떤 문제의 포장지와 그 내용물이 서로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믿게 되었고, 대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밥, 즉 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혐과 남혐의 문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보는 그 시작은 이러하다.
일단 내가 여자이므로 여자의 입장에서 먼저 이야기해 보겠다. 내가 학교 다닐 때 학기초에 반장 선거철이면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장은 남학생이 하고 부반장은 여학생이 하는 방향으로 하지."
하여 나는 자연스레 리더는 남자가 하는 것이고 보조는 여자가 하는 모양이다라고 학습하였다.
초·중·고 모두 남녀공학을 다닌 나는 한 번도 여학생이 전교회장이 되었던 때를보지 못했다. 모두 남학생이 전교회장을 했고 여학생은 보조(부회장)를 맡았다. 그리고 비판적 사고력이 전혀 없었던 나는 이러한 일을 그런가 보다 하며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집에서도 아빠가 리더였고 엄마는 보조였다. 따라서 가정의 확장인 사회도 그러하려니 하고 무의식 중에 여겼던 거 같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름 대신 '미스'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남자 직원들처럼 이름을 불러달라고 항의도 했지만 미스를 미스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 인가하는 의식으로 가득한 주변을 보면서 끝까지 저항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냥 내가 적응하는 것이 조용하고 빠르겠단 논리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접었다. 이때까지는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상호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란 내가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다시 들어간 초등학교는 내가 다니던 그 학교가 아니었다. 일단 선생님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녔을 땐 초등학교에나 여자 선생님들이 소수 근무했지 중·고등학교에선 가정이나 무용 과목을 제외한 대부분 과목 담당교사는 남자였다. 그런데 우리 딸의 학부모로 가게 된 학교에선 남자 교사가 가뭄에 나는 콩보다 적었다. 제법 큰 초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남자 교사는 2명이었을 만큼 여초 현생이 심한 곳으로 학교는 변해있었다. 들어보니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순위 고사(교원임용시험) 점수가 낮아서란다.
뿐만 아니었다. 내가 다닐 적 "반장은 남학생이 하고 부반장은 여학생이 하는 방향으로 하지." 하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학교는 이제 학급 회장이든 전교 회장이든 여학생이 할 수 있고 또한 하고 있는 그런 곳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급 회장은 으레 적극적인 여학생들이 맡고 있었다.
학교 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는 그룹은 당연 여학생들이었다. 최근 어느 중학교는 반배치고사 결과 전교 1등이 남학생이고 전교 2등부터 60등까지 여학생이라고 한다. 아들이 그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전교 1등은 아닌 아들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전교 1등 아들 엄마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59명의 여학생들이 빽빽이 아들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 전교 1등 타이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으랴.
가정도 예전 같지는 않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서 직장을 접고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가정의 주도권이 예전처럼 오로지 남자에게만 있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결혼 후 육아 문제로 전업 주부가 되었지만 많은 주부들이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의 주도권을 아내가 갖는 경우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면 육아와 살림에 도움을 받고자 친정 근처에 사는 주부들이 꽤 있는 것을 보면 남편들에게 처가의 위상도 예전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남녀의 역할에 대한 커다란 구분이 없는 이런 환경에서 학교 공부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여학생은 대학 졸업 후 취직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벽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벽은 이전까지 스스로 실력(?)이라고 믿었던 것을 도움닫이 장대 삼아서 뛰어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학교 다닐 때 자신들보다 학업능력이 항상 아래에 있었던 남학생들이 자신들보다 쉽게 벽을 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20년 가까이 갈고닦은 시험성적이 사회에 진출하게 도와주는 장대가 아니라 '남자'라는 생물학적 특징이 바로 도움닫이 '장대'로구나 여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학생의 입장에선 어떻게 될까? 남자들의 입장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렇다.
내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땐 남학생들이 전교권에 다수가 있었는데, 그 남학생들은 어떻게 공부를 잘했던 걸까? 요즘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은 전부 여학생들이다. 심지어 딸만 둔 엄마들은 "남학생들이 바닥을 좀 깔아줘야 하니까 남녀공학을 보낸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나는 이 언어폭력에 가까운 말을 딸을 둔 엄마들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엄마의 딸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 같다. 딸만 둔 엄마만 하는 것도 아니다 뉘앙스는 다르겠지만 아들을 둔 엄마도 걱정스럽게 이 말을 하며 남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원서를 쓴다. 학교가 예전처럼 중간고사 기말고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란 이름의 각종 수시평가가 있고, 자원봉사 시간도 채워야 하는 등 체크하면서 생활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천성적으로 세심함이 강점인 여학생들에게는 안성맞춤이지만 여학생들보다 산만함이 많은 남학생들에게는 힘들다.
학교 교사들도 여자들이 많아서인지 이상한 남녀평등을 지향한다. 초등학교 양성평등 시간엔 초등학교 시절엔 신체의 발달이 남녀 차이가 크지 않고, 성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나서 체육 시간 이후 체육 자료실 정리나 책 들기처럼 힘이 필요한 일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학생들을 시킨다. 남학생들 입장에선 교육 내용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공부도 못 하니 학교에 머슴으로 있는 꼴이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여학생들은 남자들에게는 남자다움을 강요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때리기도 한다. 남학생 어머니들은 절대 여학생을 때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반면 여학생 엄마들은 절대 남학생을 때려선 안된다고 가르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대신 절대 누구에게 건 맞아선 안된다고 가르치는 거 같긴 하다. 하지만 그건 남학생도 마찬가지다.
남학생들은 현재 여학생들보다 학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몸으로 놀다 다쳐서 여교사가 대부분인 학교에서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그러다 보니 가정에서도 누나나 여동생보다 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더구나 요새 가정의 주도권은 엄마가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학생들이 고군분투하여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여학생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군입대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남학생들은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딱 맞는 것처럼 생각되는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도 여학생들보다 최소 2년 늦게 졸업한 후에야 비로소 취직의 벽 앞에 서게 된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이 보기엔 취직을 수월하게 하게 된다. 여학생들이 보기엔 자신들이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딱지로 취직에서 남자들에게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반대로 남자들은 사회가 남자에게 지우는 짐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사회에서 남자에게 당연하게 지우는 짐은 군대만이 아니다. 결혼하면 집도 장만해야 하고, 억울하게 전업 주부가 된 아내와 아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돈도 벌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맡아온 머슴 역할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접을 요구하진 말란다.
내 생각에 여혐과 남혐의 근본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학교 시험이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지속되고 그 성적이라는 한 줄 세우기를 시키는 것이 바로 남혐과 여혐의 시작이다. 그럼 왜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줄 세울까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서는 성적순 줄이 사회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하여 서는 줄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식당에선 줄 선 순서대로 밥을 먹게 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한 줄로 모든 것이 통했지만 사회라는 식당은 학교와 달리 한 줄로 서지 않는다. 줄이 여러 줄이고 기준도 다양하다. 그리고 ICT와 IoT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사회에서는 전에는 없던 줄이 생겨나 줄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20여년 동안 한 줄 서기만 배워온 우리들은 여러 줄이 있어도 보지 못하거나, 보이더라도 그 줄에 설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 수 있다.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좋아하게 되어 있다. 남녀가 서로를 혐오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그럼 이토록 부자연스런 일이 왜 발생할까? 나는 내용을 알고 보면 모든 것은 밥이라는 허균의 통찰을 대답으로 하고 싶다.
일단 사회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하여 서는 줄은 한 줄이 아니고, 한 줄이어서도 안된다. 따라서 학교에서 성적이란 한 줄 서기를 그만 두고 다양성에 대하여 알려주어야 한다. 사실 줄은 다양하고 어쩌면 줄의 형태도 다양하여 때로는 긴 한 줄이 아니라 원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줄에 서서 협력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려주어야 한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사회를 이룬 것은 경쟁보다 협력의 이익이 커서라고 과학교양서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높으신 분들은 풍성한 밥상을 준비해야 한다. '밥상이 풍성'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먹으면 되므로 애건 어른이건 남자건 여자건 크게 다툴 일은 없다. 밥상이 풍성하면 모두 같이 즐거이 먹을 수 있지만 밥상이 빈약하면 어른이 먼저 드셔야 하고 가장이 먼저 먹어야 하는 등의 예절이 보다 엄격해지게 마련이다. 초라한 밥상을 보여준 후 '이것 밖에 없으니 니들끼라 피터지게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먹어라'는 국민에게 풍성한 밥상을 약속하는 열변을 토하고 난 다음 온 국민의 지갑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문제는 여혐과 남혐이 아니라 '밥상'이고 해결책도 바로 '밥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