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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ple life May 09. 2017

백인제 가옥

역사의 신산(辛酸)함과 함께 존재한 근대 최고급 도시 한옥

정독도서관 근처에 백인제 가옥이 있다고, 가회동 사시는 분께서 함께 가보자 청을 주셔서 작년 늦가을 무렵 '백인제 가옥'을 다녀왔다. 사실 가회동 분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백인제 가옥이 뭔지도 나는 몰랐다. 그런 상태로 방문한 백인제 가옥은 정말 입이 쩍 벌어질 만한 규모와 멋이 함께 있는 집이었다.


사실 한옥이란 말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전에는 그냥 '집'이란 말이면 족했는데, 개화기부터 들어온 서양 사람들이 우리네 '집'과는 다른 구조의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서양 사람의 집을 양옥이라고 부르게 되고 양옥의 상대적 의미로 우리네 집을 한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란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백인제 가옥의 건축주는 한상룡이라는 사람이다. 한상룡은 식민지 시대 일제가 조선을 수탁하기 위하여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한성은행(현 신한은행의 전신),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조선신탁주식회사 등의 설립을 주도하고 경영에 참여하여 자신의 이익을 40여 년간 충실히 챙겨 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다. 그의 외숙이 이완용이고 한상룡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가담하여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의 당시 위세를 여실히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백인제 가옥이다.  


한상룡은 1906년부터 가회동 주변 가옥 12채를 사들여 1913년까지 자신이 살 집을 지었다. 그의 집은 대지만 907평 건물은 110평의 규모다. 참고로 한국사 최악의 사건으로 불리는 경술국치일(일제에게 조선이 국권을 강탈당한 날)이 1910년 8월 29이고, 한상룡이 자신의 집을 짓고 있을 때 근처에 위치한 경복궁은 헐리고 있었다. 


당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지은 한상룡의 가옥은 전통 한옥에 일제 강점기 건축 양식 접목하였다. 첫째, 건축물 가운데 사랑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가옥의 낙성 당시 기사화될 정도로 화제였다.

둘째,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 방 일본식 벽장 등 일본식 건축 방식을 수용하여 한옥과 일본 건축 요소가 공존한다.  

셋째, 전통한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동으로 되어 있지만 한상룡의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이어져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넷째, 당시로선 귀했던 유리창과 새로운 목재로 소개된 압록강 흑송, 그리고 당시 신식 재료인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최고급 가옥이다.


백인제 가옥의 입구에 들어서 사랑 중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사랑마당이 펼쳐진다. 가옥은 서쪽의 안채와 동쪽의 사랑채로 나누어지는데, 사랑채 담장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거실은 이중창이며, 사랑 마당은 잔디가 깔려 있다. 그리고 서쪽의 안채와 동쪽의 사랑채는 속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 외에 백인제 가옥에 있는 별당에는 높은 누마루가 있어 북촌 전경이 다 보인다. 누마루에서는 전경 외에도 선자연이라고 불리는 서까래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자연은 최고의 목수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만들어 낼 수 있는 부챗살 모양의 서까래 모습인데, 탄성이 절로 난다.


한상룡의 친일 행위로 인한 자금으로 지어졌지만 백인제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상류층 건축물이다. 물론 모두 다 친일행위와 관련이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1870년경에 건립된 윤보선 전(前) 대통령 가옥은 현재 개인 소유여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지 않아 관람할 수는 없다. 

      

이 가옥은 1913년 7월 3일 완공 후 한상룡이 거주하고 있다가 15년 후인 1928년 6월 29일 한성은행(현 신한은행)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고, 그 후 1935년 1월 29일에 개성 출신 청년 부호로 알려진 조선일보사의 기자이자 주주였던 최선익으로 소유권이 바뀐다. 최선익은 중앙일보 부사장직에서 사임한 후 한상룡으로부터 가옥을 매입해 1935년부터 1944년까지 거주한다.      

1944년 9월 1일 마지막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는데 마지막 소유권자가 당시 최고의 외과의사로 이름을 날리던 백인제 박사이고, 이 가옥의 이름도 친일의 흔적을 감춘 백인제 가옥으로 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이 땅에서 최초로 신장 적출 수술에 성공하여 조선 제일의 외과 의사라는 명성을 얻고, 이후 1941년 백병원의 모태인 백인제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1944년 저택을 매입하게 된다.


백인제 박사는 1898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바로 의사 면허를 받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에서 외과 마취 조수를 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외과 조수에 이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사직하고 백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1946년 12월 17일에 백병원은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병원으로 탈바꿈하면서 백인제 박사는 다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부임한다. 백인제 박사는 1950년 7월 19일 6.25 전쟁 통에 납북되어 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인제 가옥은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쳐,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2015.11.18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백인제 가옥이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암살’에 등장인물 친일파 강인국의 집으로 나오면서부터이다. 내부를 살펴보면 안채의 대청과 툇마루는 모두 전통적인 우물마루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사랑채의 툇마루와 복도, 사랑 대청은 일본식 장마루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는 가옥의 첫 소유주인 한상룡이 일본 고위 인사들을 위한 연회를 염두에 두고 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상룡은 영화 ‘암살’의 강인국처럼 역대 조선총독부 총독들을 비롯해 당시 권력가들을 초대해 연회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조선 총독이 모두 한상룡의 가옥을 방문했을 만큼 한상룡의 가옥은 당시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류의 장이었고,  석유왕 록펠러 2세가 내한했을 당시 방문했을 정도로 명소였다.    

  

백인제 가옥을 통하여 자신의 야심과 위세를 한껏 드러냈던 한상룡은 맞은편 산업은행관리가라고 불리는 집으로 이사가 살다가, 해방 후 1946년 일본으로 도피하여 도쿄에서 일본인들의 외면 속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 해온 백인제 가옥을 둘러보면 근대 최고급 도시 한옥의 아름다움에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와 한상룡과 백인제 박사로부터 느껴지는 인생의 흥망성쇠와 무상함이 느껴진다.


"가옥은 의구하나 사람은 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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