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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ple life Jan 05. 2020

나의 일조 몽상기 3

우리 집을 지켜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집이 1조란 돈을 감당할 수 있는 집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우리 집은 서울 강북 촌구석에 아파트 한 채 있는 평범한 가정인데, 갑자기 딸인 내가 1조의 자산가가 되었다고 선언하면 직장생활에 지친 우리 아빠는 한평생 소원이라고 입에 달고 살던 히키코모리의 시니어 버전인 자연인이 되겠다며 직장을 내던질 거 같고, 엄마는 정신승리로 외면하던 친구들과의 명품 전쟁을 시작할 거 같다.


사실 나는 돈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이런 건 문제도 아닌데, 문제도 아닌 이런 문제로 결국은 나름 단란했던 가정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을 거 같다.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하겠는데, 내 느낌이 아무튼 그렇다. 나는 1조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돈이라도 소박한 우리 가정과 맞바꾸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1조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따라서 나는 가정과 일조를 동시에 지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한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죽음을 위장할까? 좀 너무 나갔다. 외국으로 취직을 했다고 할까? 요건 좀 땡긴다. 갑자기 몇몇 친구들이 워킹홀리데이라는 걸 간다고 홍대에서 거하게 술을 마시며 송별회를 한 기억이 난다. 그래, 워킹홀리데이가 있다. 청년들이 외국에서 관광, 어학연수, 취업을 할 수 있는 거였다. 워홀 떠나서 노동착취를 당했다는 둥 타락천사가 되었다는 둥 청년백수들 사이에 부정적인 소문이 횡횡하지만 나는 진짜로 떠날건 아니니, 부모님에게 백화점 포장급으로 말씀을 드리면 가짜로 무사히 떠나게 될 거 같다. 워홀을 검색해보니 가까운 일본부터 먼 아르헨티나까지 선택할 수 있는 국가가 꽤나 다양했다. 고민 끝에 좀 멀리 있고 기간도 12개월인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래, 이러면 1조의 돈과 함께 독립할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일단 한없이 잉여로운 히키코모리 생활을 딱 1년간 하려고.한다. 해 본 다음에 이 생활의 연장 여부를 결정해도 괜찮지 싶다. 아무튼 나는 돈이 많으니까 영원히 히키코모리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의 짐이 확 덜어졌다.


사람들은 히키코모리를 게으르고 무기력한 사회의 루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는 사회의 위너가 될 수 없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일이고, 자신들이 스스로 위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루저와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좀 배울 필요가 있다. 왜냐고? 나 같은 청년백수 루저는 금수저 위너를 보면 일단 짜증부터 나기 때문이다. 내가 돈 1조가 생겼다고 마음마저 루저에서 위너로 금방 옮겨지게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한없이 잉여로운 히키코모리가 되려고 하니 집부터 시작해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첩첩이 있었다. 돈이 있어도 이러니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이 없다. 일단 인터넷을 통해 매물을 알아보니 한남 더힐은 26평에서 100평까지 평수가 다양했다. 나는 혼자 사니까 너무 넓으면 좀 무서울 거 같기도 하고 해서 가장 작은 57㎡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스냅백을 쓴 차림으로 부동산에 가서 19억 8천 짜리 부동산을 계약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부동산에서 나를 수상하게 보는 기미는 없었다. 나 같은 나이에 슬리퍼 신고 와서 이렇게 나름 거금이 들어가는 계약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나 보다. 이런 제기랄.    


일단 집을 계약하고 보니 나의 잉여로운 히키코모리 생활을 좀 구체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기에 충분히 건강할지 그걸 먼저 체크해야 한다. 나는 히키코모리가 되고 싶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충분히 누리고 싶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다가 건강 악화로 죽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일단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종합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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