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가수 싸이를 좋아한다. 그의 B급 감성 가득한 가사와 춤(?), 그리고 표정까지 재미지다. 그런 싸이가 발표한 노래중에 내가 좋아하는 싸이의 정체성과 좀 안 맞는(?)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어땠을까>이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 여긴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후렴구만 써 놓는다.
왜 그랬을까 그땐 사랑이 뭔지 몰라서
사랑이 사랑인줄 몰랐어
혼자서 그려본다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때 널)
어땠을까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이런 서정이 넘치는 가사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박정현이 피처링한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두고 나는 지금 이 노래를 부르는 싸이의 마음이이다.
후쿠시마에 지진해일이 발생해서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었다는 기사를 2011년 3월 11일에 접했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원전이 파괴되었다니! 후쿠시마에 원전의 냉각장치가 고장나서 다음날 폭발이 일어났다는 대문짝 만한 기사를 보았을 땐 가슴이 철렁했다.
얼마후 너무 뜨거워진 원자로를 두면 다시 폭발할 수 있어서 바닷물을 투입하여 식힌다는 소식과 그로 인해 오염된 바닷물을 방류하였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아유 짜증나는 일본! "
우리나라 사람이면 보통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기만 하진 않다. 아니 좀 밉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후쿠시마 사고로 허둥대는 일본을 보며
"좀 쌤통"이라는 나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잊었다. 여튼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두고 여야가 끊임없이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말도 안되는 유치한 퍼포먼스를 해대서 대한민국 전체를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보다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초등학생들 미안합니다) 저런 정치인에게 나랏일을 맡겨야 하는 현실에 절망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반성이 된다.
왜 그랬을까?
왜 후쿠시마 핵문제의 본질을 몰랐을까?
그걸 왜 단지 일본의 문제인줄 알았을까?
어땠을까?
우리가 그때 처음부터 일본을 위로하고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머리를 맞대보자고
바로 옆에 있는 우리가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일본의 오염수 문제는 우리 자신들을 정치인들에게 먹이감으로 던지는 지금의 현실과는 달라졌을 거같다. 나는 후회는 해서 뭐하냐 하는 말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후회를 하지 않으면 관성적으로 행동하고 후회를 해야만 행동의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후회한다. 12년 전에 내가 의식의 수준이 낮아 둥근 지구에 있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어떤 지역의 문제는 그 지역만의 문제로 결코 될 수 없고 비록 맘이 내키진 않더라도 마음을 내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원전 그리고 이 원전이 환경문제라는 것을 제대로 몰랐던 것을 말이다.
이젠 나의 마음과 행동을 바꿔야하는데 어떻게??
나는 사실 모든일은 과학적 사고로 해결하면 해결의 시작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과학은 현상을 보고 원리를 추측하는 학문이라 도리어 싸움을 심하게 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해결은 대뇌가 아니라 편도체 안정화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이 어제 2023년 7월 26일에 상생의 소리 내부토론회의 발제를 들으면서 생겼다.
상생의 소리 내부 토론회에서 나온 후쿠시마 오염수의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은 "인류애적 관점"이라는 것이었다. 적대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면 갈등만 증폭되고 인류애저 관점에서 접근하면 일본에게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을 수 있고, 온 인류가 다함께 머리를 맞대고 특히 인접국인 우리들이 먼저 그 목소리를 내 놓으면 한 걸음 앞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뭔 뜬구름 잡는 소리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원리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처음엔 뜬구름으로 들릴 수 있다.
내가 처음 싸이의 이 노래를 들을 때 갑자기 고등학교 때 배운 외국 시가 생각이 나서 찾아봤었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지음, 피천득 역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내가 생각하기엔 싸이의 노래와 별만 내용이 다르진 않은데 재미가 많이 덜했다. 프로스트는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해 찾아봐야했지만 싸이가 박정현과 부르는<어땠을까>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듣고 또 들었더랬다.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해서도 싸이의 노래가 필요하다. 담고 있는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어쩔 땐 미디어가 더 비중이 클 때가 있다. 그래서 미디어는 메시지란 말이 있는 거같다. 나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나의 소리를 어떤 미디어로 전달해야하나? 어떤 미디어가 상생의 미디어인가?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라도 힘을 합하면 들 수 있고 우리 모두가 들 수 없는 무거운 것은 조금씩 쪼개서 들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모두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고 더구나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