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버릴까보다
나는 휴대폰에 지문을 등록해 두고 사용하는데, 종종 왕짜증이 나는 일이 발생한다. 지문으로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려고 하면 지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나임을 나의 휴대폰에 입증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다음 스텝이 비밀번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름 정확하게 비번을 입력한 거 같은데 내 휴대폰에서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몇분간 스마트폰이 잠겨버리는 일이 생긴다. 황당하다. 내가 나라는 것을 내 휴대폰을 상대로 증명해야 하다니...
2025년 11월 어느 날까지 나는 AI를 사용한 적이 손에 꼽는다. 별로 뭘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AI와 관련 없는 산업(?)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월급을 받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다 2025년 11월이었던 거 같은데, 그때 제미나이가 3.0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나는 사실 업그레이드가 되었는 줄도 몰랐다. 그냥 어느 날 성능이 좋아진거다. 세상 좋아졌구나 이러고 있는데 며칠 후 유튭에서 난리가 났다. 제미나이 나노바나나 업그레이드에 관한 영상이 여기저기 여름날 비온 후 잡초 나듯이 나타났다.
내가 생성한 이미지를 다시 봤다. 내가 생성한 이미지 안에 있는 인물이 가상의 인물이라고 여길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 이미지 속 가상인물의 표정, 근처 세심한 디테일, 그리고 물리법칙의 구현. “내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AI를 과소평가했구나”“하는 현타가 세게 왔다.
그 후로 나는 인터넷을 다시 보게 되었다. 넷상의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들이 사실은 정교한 봇의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로그인할 때 비번이 일치하지 않으면 진짜 내가 봇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인터넷의 권력자들이 진짜 나한테 미션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때마다 실존인 나는 버스가 있는 타일을 찾아서 클릭하고, 신호등이 있는 이미지를 눈 까뒤집고 찾아내는 미션을 수행했다. 이 미션을 통과하지 못하면 넷의 권력자들은 분명 바로 “나”인데서 내가 아니라고 로그인을 승인해주지 않는다. 만져지는 몸이 있는 실존인 내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넷의 권력자들에게 필사적으로 증명해야하는 것이다.
그럼 현실세계에서 나의 실존은 무엇으로 증명될까? 주민등록증은 데이터일 뿐이고, 자본주의 체제 하의 소비조차 이제는 자동 결제와 알고리즘의 대리 구매로 대체되고 있다. AI가 몸(로봇)을 갖게 되는 순간, '구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피지컬 AI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것을 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실존은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할까?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쌓는 것이다. 시간은 부피를 가지는 것인데 디지털은 그 부피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디지털은 시간을 내어 두고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는 시간의 부피로 증명된다. 시간을 내어 만나고, 이야기하고, 읽고, 쓰고, 고민하며, 좋아도하고 미워도 한다. 디지털이 아무리 우리를 납작하게 만들려해도, 우리가 시간의 부피를 갖고, 순간순간 경험의 감각들을 느낄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실존인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