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미술을 좋아하는 준이에게 작은 드로잉북을 하나 장만해줬다. 매번 이런 저런 노트들을 잘라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노트들이 너덜너덜 하길래 제대로된 걸 사주고 싶었다.
드로잉북을 펼치고 관찰 드로잉을 해보자고 했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의 관찰력, 집중력, 묘사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사물을 앞에 놓고 그려보는 방법인데 집중하기 어려워하는 준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시작하기로 했다. 사물은 집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가져다 두고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리는 것이다. 잘못 그리면 매번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지만 이번에는 지우고 다시 그려서 완성시키는 것 까지.
첫 번째 그림은 준이와 내가 모두 좋아하는 과자 ‘닭다리’ 상자를 그렸다. 네모를 그리고 글씨를 따라 그리고, 닭다리인지 알 수 없어 보이는 닭다리 과자와 닭, 상자에 그려져있는 걸 따라그리더니 “다 했어.” 미술을 전공한 엄마의 눈에는 매우 엉성해보이지만 나름 상자를 들여다보며 집중해 그리는 준이의 모습은 기특했다. 다음 날, 두번째는 새로 산 휴대폰. 케이스에 걸린 목걸이줄까지 잘 그려봐~하고 놓아주었다, 좋아하는 물건을 놓고 그리려니 마음도 즐거웠는지 이번에는 종이를 채우며 관찰한 것들을 주저없이 채워넣었다. 재미를 느낀 것 같다. 오늘은 뭘 그릴지 정해보라고 해봐야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미술을 시작해 미대까지 졸업한 나는 지금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있진 않다. 문화재단에 근무를 하니 작가들도 만나고, 디자인 작업도 할 일이 많지만 주 종목이 미술은 아니다. 그런데 그동안 해왔던 미술 작업으로 인해 업무를 해나가는데 구조적인 사고를 하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 때 어떤 재료를 선택하고 어떻게 작품을 완성해 나갈지, 실수했을 때 어떻게 수정할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어디까지 작업을 해야하는지 과정을 통해서 어떤 문제를 앞에두고 해결하기 위해 생각을 단계화하고 구조를 만드는 연습을 많이 해왔던 것 같다. 특히 공간과 입체를 다루는 학과를 전공해서 그런지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사고보다 구조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더 편하고, 그래서인지 도시 공간의 문화를 다루는 일이 재미있다고 느끼는것 같다.
단계적 사고를 어려워하고, 작업기억력이 낮은 ADHD의 경우 미술 활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구조적인 활동을 경험할 수 있게된다. 준이도 미술학원을 6개월 정도 다니는 중인데 그 덕분인지 이제는 집에서 좀더 복잡한 재료들과 방법을 이용해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준이의 주치의도 미술치료든 미술학원이던 상관 없다고하셨는데 어차피 같은 방식 안에서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고, 구체화해 실제로 만들어는 과정은 동일하기 때문인가보다.
드로잉북에 그린 그림들은 나중에 골라서 엽서나 스티커로 만들어주려고 한다. 가게놀이를 좋아하고, 자신의 회사이름을 지어서 이것저것 판매하는 상황 놀이를 좋아하니 진짜로 팔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판매해보는 경험도 좋을 것 같다. 그 전에 충분히 연습해서 팔만한 그림부터 그려보기로 하자.
미술은 더 이상 내 삶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준이를 통해서 다시 미술이 재미있어지려고 한다. 사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분야이니 그냥 손을 놓기에도 아쉽긴 하다. 나중에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방 하나에 서재를 만들고 싶었는데 한쪽 벽면에는 도구와 재료들을 준비해두고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