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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붓한일상 Feb 13. 2024

아이젠을 꼭 착용하고 올라가세요

겨울 설악산을 만났다. 도도한 설악산.

나의 여행 스타일은 무계획. 현장에서 만나고, 보는 범위 내에서 경험하는 것을 즐긴다. 맛집 조차 찾아보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지만 실패한 여행은 별로 없다. 일은 촘촘히 하는 반면 여행은 느긋하게 누리고 싶어서인지 매번 아무계획도 없는 나를 남편은 구박한다.


이번 강릉여행도 역시 무계획. 언니네집에 놀러간다는 생각에 떠나기 때문에 더더욱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다. 강릉이 다가올 무렵 남편은 역시 남의 편, 이번엔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자기가 좀 찾아보지, 툴툴 거리며 그때부터 나는 검색을 시작한다. 그것도 정말 기본적인 강릉의 장소들. 그 중에 자연으로 갈 수 있거나 준이에게 유익할 것을 고른다.


장소 선택의 기준은 실내보다는 실외로! 나와 남편은 평소에 공연장과 전시장과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엄마의 열정에 전시장을 종종 가는 준이이기에 여행을 떠나면 꼭 밖으로 나가 자연을 경험하려고 한다. 그동안 갔던 여행지들도 오대산국립공원, 강릉솔향수목원과 같은 산을 오르고, 흐르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별거 없는 모래사장에 텐트와 의자를 깔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검색 중 눈에 들어온 곳은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보자. 아주 어렸을 시절 부모님과 다녀왔던 기억 밖에 없는 나는 설악산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하다. 아침 일찍 올라가보는거야! 기상 상황에 따라 운행을 안할 수도 있어서 전날과 당일에 꼭 일정을 확인하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부터 성화를 부리는 엄빠를 따라 준이는 투덜투덜 우선 차에 올랐다. 설악산이 가까워질수록 도로 앞에 높은 산맥은 장관이었다. 눈이 왔네, 어! 허리까지 내렸네? 눈을 치워 쌓아놓은 곳을 보니 남편 키 보다 더 높이 쌓여있네? 케이블카 티켓을 끊고 올라가는 길. 하아… 설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설악산의 높이와 넓이, 굽이굽이 주름진 산맥은 눈과 나무가 어우러져 더 깊고 멋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려서 권금성부터 봉화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눈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사람들이 밟고 올라 눈은 얼음이 되어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스피커에서는 아이젠을 꼭 착용하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온다. 나는 등산용 운동화, 준이는 겨울부츠, 남편은 반스 단화. 설악산에 가겠다는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발은 초라했다. 그래도 갈 수 있는 데 까지는 가보자! 마음을 먹고 발을 떼려는 순간 준이는 안가겠다고 버틴다. 그것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시작부터 큰 얼음 덩어리 위를 올라가라고 했으니 겁이 날 수 밖에… 어르고, 달래고, 이럴꺼면 서울로 가겠다고 혼내기도 하면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이젠을 낀 사람들도 불편하고 오르기 힘들어 어그적 거렸고 심지어 맨발의 슬리퍼와 크록스를 신은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들 “조심해”를 외치며 올라갔다. 뒤돌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오기를 부려보기로 했다. 난간을 잡고 앞 사람이 밟았던 발자국을 따라 밟고 찡찡대는 준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올라갔다.


그 와중에 산의 아름다움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벌벌 떨며 기어 올라가도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를테면 올라와보라는 자태로 어깨를 활짝 펴고 있는 듯 했다. 몇번을 넘어질 위기와 마지막 나무데크를 지나 봉화대에 올랐다. 우와… 이것이 산이로구나. 설악산은 속을 확 틔워줄만큼 시원한 산이었구나! 그래, 참 든든하고 멋진 곳이었다.


잠시 멋진 장관을 감상하고 현실로 돌아와보니 발 밑은 눈과 얼음. 도서히 깃발이 꽂혀있는 봉화대 꼭대기까지 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고,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피해(넘어지면 주루룩 눈썰매 타듯 내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한쪽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진을 찍자! 남는 건 사진 뿐이다.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즐기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멋진 사진 몇장이라도 남겨보자고 자세를 잡았다.



마치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한 듯한 멋진 모습의 남편 사진, 겁 먹은 준이를 꼭 안은 사진, 하얀 눈 가루가 따귀를 때리는 강풍을 겨우 버티는 내 사진, 자기 키 만큼 쌓인 눈 속에서 눈덩이를 들고 뒹굴던 준이 사진… 평소에 찍을 수 없는 사진이기도 했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 조차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사진 찍겠다고 넋놓고 있다가 넘어지면 내 아래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다 같이 넘어지는 대 참사가 일어날테니 조심조심! 카메라 각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진을 남겼으니 이제 내려가자, 준이에게는 차라리 앉아서 내려가~ 나 역시 쪼그리고 몸을 낮췄고, 난간을 잡고 얼음보다 눈을 밟고 무사히 세 식구는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내려왔다. 아…다리에 힘을 너무 줬나 무릎이 아프다. 카페에 앉아 잠시 쉬다가 기념품 가게가 보여 들어갔다. 우리는 집 현관문에 다녀온 여행지의 기념 자석을 붙이는 걸 좋아하는데 겨울의 케이블카가 그려진 자석을 구매했다. 자석을 보며 산 위에서 울며불며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던 준이를 놀려야지,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우리 참 대단하다. 뒤돌아가지 않고 우리는 멋지게 올라가서 사진도 찍었어! 비록 울었지만 준이 너 정말 멋지다! 끝까지 해냈잖아! 그렇게 우리들의 추억을 소환하겠지.


여유를 부리려고 출발한 여행이 시작 일정부터 강행군이었지만 역시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옳다. 다음에는 눈이 없는 가을 설악산을 만나기로 하자, 그리고 다음에는 등산 신발과 지팡이도 챙겨오도록 하자! 겨울에는 아이젠 필수!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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