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12시 정각 나는 냄비에 물을 끓였다. 저녁을 못먹은 날이었는데 보통 가볍게 먹고 끝내던 걸 어제는 괜히 오기를 부리며 너구리 한마리를 잡았다. 그래도 양심은 지키자며 알배추와 연두부를 같이 넣고 끓여 면은 반이상을 남기고 혼자 마음을 위안했다.
아침에 위의 부담을 느끼며 일어났고, 출근해 4개의 미팅을 소화했다. 오늘도 그 구의원의 요구자료를 30페이지가량 정리해 공문을 보냈고, 그 구의원에게 1시간30분을 붙들려 시달린 구청 과장님의 하소연을 들었다. 축제 토론회에 대한 조례를 만든다고 하는데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다. 축제를 끝낼 때마다 토론회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올해 나에게 주어진 축제가 3개나 되는데 어디론가 도망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눈에 밟히는 팀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누군가는 버텨줘야 하지 않는가 싶다.
성명서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 다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 전문가로서 문화예술 생태계를 일궈가는 사람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업무 환경... 인신공격 당하지 않으며 존중 받을 수 있는 그런 일터. 직장 내에서는 존중 받으며 일해도 그 구의원의 말 한마디로 모두 바보 멍청이가 되는 상황... 존중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도 존중받지 못할 것을 모르는가보다.
누구를 위한 질타인가, 무엇을 위한 의심이고, 뭘 얻고자 함인가...? 그래서 그렇게 괴롭히고나면 희열이 느껴지나...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지만... 꿀떡 삼키고 내일 다시 출근해서 할 일들을 생각한다. 지긋지긋하지만 그것을 이기고 나는 즐기며 일 할 것이다. 그 것이 내가 그 구의원을 이기는 것이고, 떳떳하게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이다.
어제 너구리를 잡은 오기는 그 구의원에게 받은 스트레스의 화풀이였던가, 할 일도 많은데 주말 출근을 불사하며 요구자료를 검토하고 수정하며 느낀 허무함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내 입이 궁금했던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배추를 잔뜩 넣은 너구리는 훌륭했다. 알배추는 경동시장에서 3개에 6,000원에 살 수 있다. 내일은 토실토실한 애플망고 4개를 10,000원에 사서 퇴근해야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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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쓴건 며칠 전... 그 사이 요구자료 공문이 2개가 더 왔다.
의원이 요구자료를 달라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응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료를 받을 때까지 괴롭힌다. 없는 말도 꾸며내며 일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공개하지 않을 경우 회계 감사와 행정사무감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협박 아닌 척 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털어봐라... 실 오라기 하나 나올게 있나.
정직하게 일해도 의심받는 세상.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 해야 하나.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 하라는 대로만 일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멈춤이 필요한 때인가. 왜 항상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일 해야 하지, 잘 하려고 하는데, 못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이유가 뭘까. 아니... 이해하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이제는 싫다.
일상이 다 짜증이 나고, 애쓰는 것이 의미 없어진 시간들.
주말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출근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