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와 함께 보낸 휴가 같던 날들
('악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준이가 할머니집에 놀러간 3일. 조용한 집, 거실에 누워 무기력하게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린다.
뭘 볼까. 연예인들이 여행가고, 집에서 혼자 뭔가 만들어 먹고, 여럿이서 수다를 떨거나 복귀한 가수들이 '그땐 그랬지...'를 추억하는 장면들 죄다 관음증 같다. 재미있는게 없네.
신랑은 악귀를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어두운 밤 거실에서 보고있을 때 내가 방에서 스윽~ 나오면 화들짝 놀랄만큼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이야기라며 추천한다. 시각적 인지가 빠르고 도장찍듯 기억이 오래 남아 종종 괴로움을 느끼는 나는 무서운 영상은 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야동 한번 본적이 없다. 아무도 믿지 않지만... 사실인걸.
콤부차 상자에는 김태리가 웃고있다. 준이는 그걸 보면 '악귀누나'라며 반가워한다. 악귀를 보진 않았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썸네일에 이미 아는사람인척 소개하고싶은가보다. 김태리가 주인공이니 재미있겠지. 나는 김태리를 좋아한다.
디즈니플러스를 켠다. 으스스한 표정을 짓고있는 김태리 얼굴이 나온 썸네일을 선택, 12편 이제부터 정주행이다. 3일동안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된채로 자동으로 '다음 화 보기' 넘어가고 넘어가고.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괜찮은건지...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있는 나만의 시간인 만큼 효율성은 저리가라.
악귀는 그림자와 표정으로 표현된다. 긴~ 머리카락이 펄럭펄럭~ 김태리의 야무지고 무서운 미소. 정말 귀신이 있다면 저런 표정일까, 세상의 모든 무섭고 이해안되는 일들이 악귀의 짓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현실에서는 정말 무섭겠다. 정말 잘 표현했네.
순간 순간의 공포와 놀람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귀신보다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악귀라는 존재가 무섭지는 않았고 오히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감상을 남긴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
나는 한 순간도 나를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었어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해 본 적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걸어가 본 적도
나는 왜 누굴 위해 스스로에게 가혹했을까?
어둠속으로 나를 몰아세운 얼굴은 나의 얼굴이었어
내가 날 죽이고 있었어
그걸 깨닫고 나니 죽을 수가 없었어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택할꺼야
엄마를 위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도 아닌
온전히 나의 의지로 살아가볼거야
대사를 들으며 잠시 결론이 유치하네 라는 생각을 했다가 나에게 대입해본다. 나는 나를 위한 순간을 얼마나 살아왔나. 나는 지금 현실에 살고있나? 이상적으로 바라고 있는 무언가만 상상하며 지금을 기쁘게 여기지 못하고 앞으로만 가고 있는건 아닌가. 너무 교훈적인데? 너무 착하게 결론이 나는 것이 다소 힘이 빠진다고 느끼긴 했지만 '결국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하며, 나의 사람들과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의미를 찾아본다.
한편으로는 주인공 산영이가 할머니의 고액 유산과 집을 받지 않았다면, 그래도 나만을 위한 나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까라고 반대의 질문도 던져본다. 여전히 전세보증금을 걱정하고, 경제적인 환경에 억눌리는 삶이라면 그 고달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경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을 위한 삶을 자유롭게 살아낼 수 있을까. 그런 팍팍한 삶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며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보여지지 않음이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궂이 그것까지 구구절절일 필요는 없지...라고 생각을 바꾼다.
'악귀' 재미있었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추천한다.
3일 간, 휴가 같았다. 악귀와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보낸 시간은 충분히 좋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이렇게 보낸것이 얼마만인가. 가끔 이런 시간도 필요하구나. 주인공인 산영이처럼 이렇게 나도 말해본다.
"나는 왜 누굴 위해 스스로에게 가혹했을까?"
가혹이라는 단어가 좀 과하긴 하지만 휴가다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빡빡하게 보냈던 일상이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준이가 집에 돌아왔다. 고모집, 친할미집, 고조할미집을 돌며 사랑을 가득 받은 준이는 한껏 방긋거린다.
"행복했니?"
"응!"
짧은 한글자에 3일동안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웠는지 느껴진다.
'엄마도 너만큼 즐거웠고, 행복했단다.'
이제 방학이 일주일 남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방학숙제들을 챙겨야 하지만 곧 주말에 떠날 강원도 여행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잘 살아내보자.
한줄요약 : 가끔 데굴데굴 뒹굴거려도 괜찮은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