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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Nov 04. 2017

잠깐 잡고서 가는 운전대로

오늘 날씨 이제는 겨울

아버지는 어린 나와 덜 어린 형을 데리고 어느 강으로 갔다
그의 앎과 감에 우리는 손을 내주고 있었다
세 걸음 걸으면 우리는 잔발로 여섯 걸음을 따라 걸었다
발바닥으로 긁어 굵은 돌을 차낸 공간은 적당한 세 명이 누울 자리
그는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형과 나는 모종삽으로 도랑을 팠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밤새 비가 오고 했지만
나는 어려서인지 잠을 잘 잤다

아버지에게 결정을 빼앗아 왔다
구글을 모르는 아버지에게
와이파이를 연결해줘야 하는 아버지에게서
그에게는 이제
어느 것이 소나무인지 어느 것이 잣나무인지 묻는다
그에게는 이제
경주에 있는 것이 무령왕릉인지 무열왕릉인지를 묻는다

더 빠르지 않아도 되는 것들
틀려도 적당히 잊어버리면 되는 것들

실패가 무서운 나이가 되었다
나의 앎과 감을 꺼내 잡는 손들을 끌고
나는 어디로 세 걸음을 걸어 잔발 네 걸음이나 여섯 여덟 걸음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서 우리가 심하게는 모욕당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는 우리가 창 밖에다 웃으면서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서는 우리가 무너지듯 좌절하진 않고
어느 곳에서 우리가 도랑을 파듯 정성을 들인 만한 것들을 시작해 볼 수 있을까

언젠가 나도 구글을 쳐다보지 않고
적당히 뒷짐 걸음으로
적당히 쳐진 앎과 감으로
적당히 멍청하게 굼뜬 반응으로
그래 괜찮다 그래 좋구나
그리고 다 미안하구나

그래도 나는 더이상 아버지에게는 묻지 않는다
그가 그랬듯
나도 그럴 때가 되었으니까

실패로 연결될 길을 왜 그렇게 고집스레 걸어 갔을까
그 모든 할아버지들은
믿고 잠들던 머리 위로 든 손을 내려 이불 안에다 넣어주면서
언젠가는 그가 우리들에게 사과하게 될 것을 아셨을까
나는 너희들에게 사과하게 될 것을 알고 있을까

너와 나는 벌써 다른 높이의 간판을 보지
나는 무섭다
그렇지만 나도 그럴 때가 되었다

잠깐 잡고서 가는 운전대로
우리는 많이도 휘청거린다

그럼에도 하루는 정확히 밤에서 새벽으로 가 닿는다

W 심플.
P Dale Nibbe.



20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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